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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침엽수 같은 꺾어 쓰는 글자체, 알프스 넘으면 둥글고 넓은 로만체로

중앙선데이 2017.03.12 00:02 522호 14면 지면보기
이탈리아구나. 아, 내가 이탈리아에 왔구나!
 

<새 연재> 유지원의 글자 풍경

길에서 평범한 연구소의 간판 하나를 마주쳤다. 탄성을 머금은 채 그대로 멈춰서서 들여다봤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어 막 이탈리아에 도착한 직후였다. 내가 살던 독일의 일상에서는 보기 드문, 둥글고 밝고 비례가 우아한 글자들이 하얀 돌 위에 나른히 새겨진 채, 남쪽 나라의 화사한 태양 아래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며 몸을 늘이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 이탈리아가 깃들어 있었다.
 
독일은 유럽 대륙 한복판에서 아홉 개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여권만 있으면 걷거나 자전거 타고 동네 장보러 가듯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다. 국경을 넘어도 풍경은 대체로 연속적이다. 언어가 불연속적인 듯 바뀌지만 국경 지역의 언어는 두 언어가 어느 정도 섞인 경계의 성격을 갖고 있다. 확실하게 불연속적인 것은 도로 표지판의 글자체들이다. 국경을 넘으면 도로에서 각국이 지정하는 공식 글자체가 바뀐다.
 
국경을 넘는 가장 드라마틱한 경험은 단연 알프스를 넘을 때다. 독일에서 알프스를 넘어 마침내 남쪽 나라 이탈리아의 풍광이 나타나는 순간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버스로, 자동차로, 기차로, 비행기로 넘을 때에도, 오스트리아의 알프스를 넘을 때에도, 스위스의 알프스를 넘을 때에도, 매번 눈부신 변화를 접했다.
 
알프스를 넘어가면 태양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나뭇잎의 반짝임이 달라지고, 바람이 달라지고, 올리브 나무의 회록색을 닮은 듯 건물들의 재질과 색채감이 달라진다. 그렇게 사람들의 피부색과 생김새가 달라지고 기질이 달라지며, 언어가 달라진다. 그리고 글자가 달라진다.
 
1 하르트만 셰델의 『연대기(Chronik)』안톤 코베르거 발행독일 뉘른베르크, 1493

1 하르트만 셰델의 『연대기(Chronik)』안톤 코베르거 발행독일 뉘른베르크, 1493

2 피에트로 벰보 추기경의 『에트나(Aetna)』알도 마누치오 발행,이탈리아 베네치아, 1495

2 피에트로 벰보 추기경의 『에트나(Aetna)』알도 마누치오 발행,이탈리아 베네치아, 1495

열정의 이탈리아인들이 만든 로만체와 이탤릭체
폭이 좁고 어둡고 뾰족한 느낌의 독일 글자들과 달리, 이탈리아의 글자들은 햇빛을 받아 몸을 활짝 피고 있었다. 마치 검고 빽빽하며 수직성 강한 침엽수의 숲이 점차 사라져가면서, 둥글고 넓은 활엽수 잎들이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돋아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독일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블랙레터’라 불리는 양식의 글자체를 널리 썼다. 이름 그대로 획이 굵고 흰 공간이 좁아 지면이 전반적으로 검게 보이는 글자체다. 획이 세로에서 가로로 방향을 틀 때, 둥글고 부드럽게 이어서 쓰지 않고 절도있게 꺾어서 쓰기에 ‘꺾어 쓰는 글자체’라고도 부른다. 이에 대비해 흰 공간이 크고 밝으며 폭이 넓고 비례가 풍부한 이탈리아적 글자체는 ‘화이트레터’라고도 부른다. 정식 명칭은 ‘로만체’이다.
 
구텐베르크가 아직은 중세에 발을 딛고 근대로 향하는 기술적 외연을 구축한 이후, 이탈리아의 출판업자들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널리 익숙하게 사용하는 로만체의 근간을 마련하며 문화적 내연을 풍요롭게 채워나갔다. 때는 15세기, 바야흐로 르네상스 시대였다. 인문의 가치를 중시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지식인들 취향에 독일식 검고 빽빽한 지면은 맞지 않았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담은 인본적 문헌은 인간의 손으로 쓴 듯 자연스러운 지면을 취해야 했다. 열정 넘치는 이탈리아의 출판업자들은 까다로운 기술적 공정을 거쳐 로만체와 이탤릭체를 만들어냈다.
 
벰보 추기경의 『에트나(Aetna)』 본문 셋째 줄 ‘fructus’와 넷째 줄 ‘ferebat’를 보면 f의 윗부분이 각각 r과 e의 영역 위로 살짝 넘어오면서 글자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다. 아래 o와 f를 나란히 조판한 이 금속활자들처럼, f의 위아래 끝이 활자의 사각형틀을 벗어나도록 해야 이런 조화를 갖출 수 있다. 이탈리아의 밝고 고전적이며 인간적인 지면 뒤에는 이렇듯 활자체 제작자들의 땀과 노고가 깃들었다. 당대로서는 번거로웠던 기술적 도전의 결과였다.
 
탈지역적인 디지털 시대, 지역별 글자체가 주는 의미
15세기 금속활자 발명 이전에는 손으로 쓴 글씨의 역사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라틴어를 위해 로마인들이 완성한 로마자는 남쪽에서 알프스 북쪽으로 넘어왔고 알프스 북쪽의 언어와 풍토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갔다. 글자도 각자 처한 저마다의 생태적 토양에서 배태되고 자라나는 생물 같아서, 알프스 북쪽의 자연과 인문, 기술 환경 속에서 블랙레터는 제 기능을 나름대로 충실하게 수행해갔다. 수직성이 강하고 폭이 좁은 특성은, 한 단어가 길어지는 경우가 많은 독일어의 성격에도 부합했다. 블랙레터는 르네상스 시대의 슈바바허체에서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시대의 프락투어체로 시대에 따라 진화해나갔고, 지역마다도 양식을 달리하며 다채로운 양상을 띄었다. 오늘날 블랙레터의 입지는 좁아졌지만, 젊은 글자체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글자생태계 속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시스템에 기본으로 탑재된 폰트들이 전세계에서 획일적으로 적용되기도 한다. 다국적 기업들에서 사용하는 고딕체(산세리프) 계열 글자체들은 탈지역적이고 탈역사적인 국제적 성격을 구축해갔다.
 
이런 세계화와 디지털 기술의 시대에도 지역적 다양성의 가치는 양립해 존재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의 산지 와인을 맛본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강렬한 태양에 달구어진 흙이 포도나무를 키워내 포도가 영글고 숙성되는 과정 전체가 한 병의 와인에 담겨 내 몸에 동화되는 것 같았다. 전세계로 유통되는 주류들 속에서도 산지의 와인이 인간에게 대체하기 어려운 가치를 지니듯, 글자 역시 여전히 재료에 닿는 아날로그적 성격과 지역적 고유성을 가진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가던 무렵, 그가 살던 곳으로부터 약 8500km 동남쪽으로 떨어진 지역에 그와 거의 동년배인 한 학자가 살았다. 구텐베르크의 발명과는 다른 방식이었지만 그 역시 금속활자 인쇄술을 알고 있었다. 그는 15세기 중반에 편찬된 한 책의 서문을 썼다. 서문에서 그는 이런 취지의 말을 한다. “사방의 지역마다 자연의 풍토가 다르다. 따라서 지역마다 사람의 발성과 호흡도 달라진다. 그러니 언어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글자 또한 서로 달라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억지로 같게 만들려고 하면 조화에 어긋난다.”
 
글자의 생태적 성격을 이보다 잘 드러내는 고전 문헌이 또 있을까? 타당하고 아름답다. 그는 세종 시대 집현전 대제학을 역임한 정인지로, 그의 이런 생각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에 남겨졌다. ●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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