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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 고취? 암흑 시대 처절한 청춘 이야기죠”

중앙선데이 2017.03.12 00:02 522호 16면 지면보기
올해는 윤동주(1917~1945)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 기상천외한 줄임말과 신종 외계어로 국어가 잔뜩 오염돼 버린 오늘, 한글 사용이 금지당했던 일제 강점기 주옥같은 시들로 아름다운 우리말과 글을 지켜낸 국민 시인의 존재가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문학계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여기저기서 그의 시와 삶을 조망하는 작업들이 진행 중이다.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
주연 배우 박영수·온주완

창작가무극을 만드는 서울예술단도 대표 레퍼토리 ‘윤동주, 달을 쏘다’(3월 21일~4월 2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를 올해 첫 작품으로 택했다. 2012년 초연 이래 꾸준히 사랑받으며 지난해에는 객석 점유율 100%를 기록했던 화제작이다. 올해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조금 더 힘을 줬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인 배우 온주완(34)이 뉴 캐스트로 합류한 것. 뮤지컬에는 지난해 ‘뉴시즈’로 막 데뷔한 신인이지만, 초연부터 줄곧 아름다운 청년 윤동주를 연기해온 서울예술단 출신 배우 박영수(35)와 맞대결을 펼치게 됐다. 두 명의 윤동주는 각자 어떤 매력을 보여줄까.

 
 
“형을 보면 ‘와, 진짜 이 사람은 윤동주에 빙의했구나’ 싶어요.”(온) 
“주완이가 더 닮았죠. 시인도 사실 남자다운 면이 있었거든요.”(박)
 
3일 오후 예술의전당 국립예술단체 연습실. 바쁜 연습 스케줄로 점심시간에 어렵게 짬을 내 만난 두 사람은 이미지가 판이했다. 다 먹은 오렌지색 도시락 가방을 얌전히 들고 일찌감치 나타난 박영수는 사슴같은 눈망울이 ‘천상 윤동주’였지만,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형들은 귀여운 동생을 좋아한다”며 박영수에게 ‘부비대는’ 온주완은 윤동주보다 송몽규에 더 가까워 보였다.
 
“주완이가 더 남자다운 느낌이라서 그런데, 오히려 외모는 제가 더 안 닮았어요. 시의 감수성 때문에 많은 분들이 윤동주 시인이 조용할거라 생각하는데, 알고보면 웅변대회에 나가고 축구와 농구도 좋아한 활동적인 분이었다고 해요. 저희 공연에서도 초반에는 그런 면이 보여지죠. 시대적인 암울함 때문에 점점 정적으로 변하게 되지만.”(박)
 
 

윤동주가 예술가로서 시대를 반영했다면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박영수- 

 
“사실 작품 선택할 때 고민이 많았어요. 처음 대본 볼 땐 내가 이런 이미지였나? 왜 나를 섭외했지? 의아했죠. 형의 공연 영상을 보고 나서 열정이 생겼어요. 영화를 봐도 잘 울지 않는데 휴대전화 유튜브 영상을 보며 울고 있는 제 모습에 제가 놀랐죠. 형의 연기 속에 시인이 안개처럼 보였거든요. 박영수란 배우가 이렇게 잘 만들어 놓은 윤동주지만, 온주완도 좀 다르게 할 수 있을 거란 확신으로 용기를 냈습니다.”(온)
 
서울예술단의 공연기간은 통상 1주일 정도이지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주로 늘리면서 더블캐스팅이 필요해졌다. 워낙 혼자 짊어지는 부분이 많은 어려운 역할이라 연기력이 캐스팅의 관건이었고, 마침 온주완도 ‘뉴시즈’ 이후 화려한 쇼뮤지컬보다 연기를 제대로 보여줄 작품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두 달 이상 연습해 2주 만에 막을 내리는 공연에 스케줄 왕성한 스타 연예인이 참여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 아쉬워요. 한달쯤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일주일만 한댔어도 했을 거 같아요. 이 작업을 하면서 ‘행동이 우리를 정의하고, 정의로움이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윤동주를 접하면서 저를 많이 내려놓게 됐어요. 마음의 여유도 생긴 것 같구요.”(온)
 
박영수“윤동주가 예술가로서 시대를 반영했다면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박영수“윤동주가 예술가로서 시대를 반영했다면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노래 한 곡, 시 한 수도 섬세하게 표현해야”
한편 박영수에게 윤동주는 ‘인생캐릭터’라 할 만큼 각별한 의미다. 서울예술단 단원으로 처음 맡은 주인공이었고, 이를 계기로 외부 활동까지 하게 됐기 때문이다. 
 
“초연 때 객원 없이 단원들만으로 공연에 성공한 것도 드문 일이고, 짧은 기간내에 4연이나 올린 이례적인 작품이죠. 개인적으로는 저를 알릴 수 있었지만, 뮤지컬을 그만둘까 생각할 정도로 한계에 부딪쳤던 캐릭터예요. 결과적으로 제 자신을 재정비하는 계기가 됐죠. 조금 이겨내고 나니까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박)
 
올해는 공연의 의미도 특별할텐데.
박: 100주년이다 보니 시인에 대해 깊이 생각 안 하셨던 분들도 많이 보러 오시고 관심 가지실 것 같아요. 저도 초연 때 마음으로 돌아가 노래 한 구절구절을 다시 바라보게 됐죠.

온: 저는 ‘피해는 주지 말자’는 자세로 시작했어요. 서울예술단 형·누나·동생들이 다 만들어 놓은 공연에 저만 백지상태로 들어가는 거라 부담이 컸거든요.

박: 주완이는 정말 대단한 게, 사전미팅 때 대사를 다 외워왔더라구요.

온: 작년 공연 영상을 20번 넘게 봤거든요. 부담감이 너무 커서 설에 집에도 안 내려가고 대본과 영상을 연구하며 보냈죠.


박: 오히려 제가 주완이에게 배우고 있어요(웃음). 제가 신혼여행 때문에 연습을 좀 늦게 시작했는데, 요번에 안무와 동선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먼저 숙지한 주완이가 절 많이 도와줬죠.

 
뮤지컬계에 입문해 두 번째 무대에 서게 된 온주완은 “두 번째라고 수월한 건 없다”고 했다. 전형적인 디즈니 뮤지컬 ‘뉴시즈’와 한국형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는 “느낌이 너무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뉴시즈’의 잭 켈리가 에너제틱한 리더였다면 윤동주는 정반대잖아요. 처음엔 가만히 서서 노래부르는 게 힘들었죠. 하지만 관객이 제게서 떠올리는 동적인 이미지를 무색하게 만들어야 하는 게 배우의 임무라고 생각해요. ‘뉴시즈’가 분위기 만드는 게 중요했다면 윤동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디테일하게 연기로 채워가야 하니 임하는 자세도 완전 달라요. 섬세하게 시 한 수, 노래 한 곡을 표현해야 하니 훨씬 조심스러워야 하죠.”(온)
 
독백이나 노래로 윤동주의 시를 들으니
새삼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느껴졌어요.
박: 같은 말인데도 시인을 통해 만들어진 조합이 많은 상상력을 주는 것 같아요. ‘팔복’이란 시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는데, 그 말의 의미가 다 다르거든요. 시인이 그 말을 어떤 운율로 나누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는 게 우리말만의 감성인 거 같아요.


온: 저도 원래 시를 좋아해요. 혼자 써보기도 하구요. 근데 이 작품 하면서 내 시는 시도 아니란 걸 깨달았죠(웃음). 제가 연기하는 윤동주니까, 그를 이해하면서 감정을 담아 시를 읊조리는 게 참 재미있네요.

 
시인은 엄혹한 시대에 시를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꼈죠.
온: 윤동주의 시에는 항상 부끄러움이 동반되는데, 사실 이해가 안 가요.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은 총칼보다 강한 힘으로 살아남은 게 그의 시니까요. 그가 느낀 부끄러움을 연기에 투영해야 하는 게 어려운 숙제에요.


박: 당시 예술가로서 암흑같은 시대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한 게 더 강단있는 행동일 수 있죠. 절대 유약한 사람은 아니예요. ‘시를 쓴다는 것’이란 넘버가 있어요. ‘시는 나에게 무엇인가, 아픔을 배우고 청춘을 바치고 써내려간 시는 나에게 너에게 무엇인가’라는 곡인데, ‘시’가 회사원에게는 업무고, 관객에게는 공연장에 오기 전에 하고 왔던 일들인 거죠.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아야할 것 같아요.

 
온주완“영화를 봐도 잘 울지 않는데휴대전화 유튜브 영상을 보며 울고 있는제 모습에 제가 놀랐죠. 형의 연기 속에시인이 안개처럼 보였거든요.”

온주완“영화를 봐도 잘 울지 않는데휴대전화 유튜브 영상을 보며 울고 있는제 모습에 제가 놀랐죠. 형의 연기 속에시인이 안개처럼 보였거든요.”

“30주년 콘서트에 서는 게 꿈”
‘윤동주, 달을 쏘다’는, 최근 앙코르 공연에서 이례적인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 ‘영웅’의 한아름 작가·오상준 작곡가의 작품이다. 하지만 ‘영웅’과는 결이 전혀 다르다. 애국심을 부추기는 속칭 ‘국뽕’ 계열이 아니라 그 시대를 처절히 살았던 청춘의 이야기이자 그 청춘이 시대에 맞섰던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는 게 이들의 얘기다.
 

영화를 봐도 잘 울지 않는데 
휴대전화 유튜브 영상을 보며 울고 있는 
제 모습에 제가 놀랐죠. 형의 연기 속에 
시인이 안개처럼 보였거든요. 
-온주완-



“애국심보다 시인에 대한 이야기예요. 지금도 청년들은 취업난에 ‘몇포세대’다 해서 암울한데, 그 시대 윤동주도 희망 없는 청년기를 보낸 거죠. 백년 뒤에 지금을 돌아본다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탄핵에 촛불시위가 몇 달째 계속되고 있고, 지금 우리에게도 시위를 하든 예술을 하든 이 시대를 사는 각자의 방식이 있잖아요. 이 공연은 그들이 얼마나 아팠을까를 돌아보며 동시에 지금을 바라보게 하는 것 같아요. 나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저도 시위에 참가해보지 못했지만, 윤동주가 예술가로서 시대를 반영했다면 저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박)
 
“엊그제 삼일절에 퇴촌 위안부센터 나눔의 집에 다녀왔어요. 역사관도 둘러보고, 그 시대의 아픔을 공감해 보고 싶어서였죠. 애국심과는 다른 차원이지만, 사람을 용기있게 만들어주는 작품인 것 같아요.”(온)
 
외부활동이 늘어나 2009년부터 몸 담았던 서울예술단을 퇴단하고 객원으로 참여 중인 박영수는 “한국적 소재를 가장 대중적이면서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서울예술단”이라는 자랑을 잊지 않았다. “왕성히 활동하는 연출가들도 상업 프로덕션에서 해소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예술단을 통해 그 분들이 예술적으로 소신을 펼치기도 하고 실험도 할 수 있죠. ‘윤동주’도 그런 작품이예요.”(박)
 
“제가 대중성을 가진 배우로서 예술단에 참여하면서 ‘윤동주’라는 좋은 극을 조금은 더 알려야 된다는 마음이 커요. 더 많은 분들이 윤동주를 알게 되고, 이 공연도 계속 이어가게 됐으면 좋겠습니다.”(온)
 
“‘레미제라블’처럼 ‘윤동주’로 30주년 콘서트를 하는 게 꿈이에요. 제가 나이 들어 외솔 선생이나 일본순사 역을 할 수도 있겠지만, 화려하지 않아도 윤동주와 그의 시를 함께 만나는 공연으로 남았으면 해요.”(박)


“10주년부터 저도 꼭 같이 하고 싶네요.”(온)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서울예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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