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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시시각각] 대통령의 가장 큰 죄

중앙일보 2017.03.08 02:58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때론 집안일을 이웃이 더 잘 꿰고 있을 때가 있다. 특히 가정 내 불화가 심할 경우 그렇다. 이웃이 더 냉철하고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 쉬울 수 있다. 며칠 전 미국 국무부가 펴낸 ‘2016년 국가별 인권보고서’에 관심이 가는 게 그래서다.
 

부패 대 반부패를 보수 대 진보로 바꿔
화합을 말하지 못하게 만든 인권 침해

미 인권보고서엔 ‘부패와 정부의 투명성 부족’ 항목이 있다. 한국은 늘 이 부분을 쉽게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도 예년에는 대체로 일부 관료들의 부정부패로만 언급돼 왔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주 구체적이다. 최순실·안종범·우병우 이름까지 거론하며 국정 농단 사태를 다뤘다. 대통령까지 연루된 정황을 지적하고, 특검 수사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진행 과정을 언급했다. 대통령에 반대하는 대규모 평화시위가 이어지고 있다고도 소개하고 있다.
 
미국이 부패와 정부 투명성을 인권 문제로 접근하는 건 참으로 옳아 보인다. 부패는 공정한 경쟁을 방해함으로써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 인권인 ‘기회의 평등’을 침해하는 까닭이다. 정부의 투명하지 못한 권력 집행은 그런 부패가 자라는 온상이 된다. ‘대통령의 오랜 친구’의 딸에게 특혜를 베풀어 다른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한다. 정부 마음에 들지 않는 성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원받지 못하는 것 역시 명백한 인권 침해다.
 
국정 농단이란 게 결국 부패요 인권 침해다. 엄정해야 할 국정을 특정인에게만 유리하게 재단했으니 인권을 유린당한 다수의 피해자가 생겼다. 한마디로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는 부패 대 반부패 문제란 얘기다. 사실 부패와 반부패는 싸움의 상대가 안 된다. 부패란 척결의 대상이지 링에 오를 선수가 아닌 까닭이다.
 
그런데도 지금 세상이 시끄러운 건 농단의 부역 세력들이 문제의 프레임을 보수 대 진보의 싸움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싸질러놓은 똥 무더기를 보수정권을 해코지하려는 진보의 음모로 몰아세웠다. 2년 전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사건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으로 둔갑시킨 수법이 그대로 사용됐다. 그때 원인치료를 잘 했더라면 이런 사태는 없었을 텐데도 덮어 가리는 데 급급하던 그들이 치부가 까발려지자 오히려 성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전두환식’이었다. 역대로 주변 비리가 없었던 정권이 없었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거였다. 과거의 최하위 수준이 비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반론에 막히자 “여성 대통령에 대한 성차별이냐”며 여성 혐오로 몰았다. 다음엔 꼬리 자르기였다. 대통령은 한 푼도 받은 게 없고, 최순실이 다 해먹었다는 거였다. 최순실을 챙겼던 장·차관, 비서, 재벌들만 대통령 속뜻을 모른 바보가 됐다. 그런 대통령이 왜 “여야가 일정을 제시해 주면 사임하겠다”는 대국민 사과를 한 건지는 불가사의로 남았다.
 
부역 세력의 오리발 작전은 산업화 세대의 ‘박정희 향수’를 자극했다. 우리 영애의 인권을 지켜야 했다. 무능한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동원이든 어쨌든 촛불에 맞서 태극기를 들었다. 대한민국은 세대 갈등의 깊은 골로 빠져들었다. 한 나라에서 젊은 세대와 노년 세대가 서로를 부정하는 지경이 됐다. 한 가정 안에서도 세대 간 대화가 사라졌다. 이것을 우리는 국정 농단이라 읽고, 미국은 인권 침해로 읽는 사태가 만든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며칠 후면 심판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두 세대는 여차하면 불복할 태세다. 돈을 한 푼도 안 챙겼든, 최순실과 재산공동체였든 대통령의 가장 큰 잘못은 이 사회를 이렇게 두 동강 낸 것이다. 설령 탄핵이 기각되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다. 이 땅에 화합을 말할 수 없는 분위기로 만든 인권침해죄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세인트루시아 작가 데릭 월컷의 말이 생각나 섬뜩하다. “복수를 외치는 사람은 적이 될 뿐이다. 평화와 사랑을 말한다면 사람들은 분노해 당신을 죽일 것이다. 예수가, 킹 목사가, 간디가 죽은 것도 모두 그래서였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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