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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가 노는 곳이라고? 당대의 쟁점이 분출되는 가장 정치적 행사

중앙선데이 2017.03.05 02:30 521호 26면 지면보기
아카데미 시상식·베를린 영화제의 정치학
1 지난달 26일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8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이 트로피를 들어보이고 있다.

1 지난달 26일 미국 LA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8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문라이트’의 배리 젠킨스 감독이 트로피를 들어보이고 있다.

영화 ‘문라이트’의 시사를 앞두고 이 작품을 국내에 수입한 회사의 대표 K씨는 사람들로부터 심심한 위로의 말을 들어야 했다. 사람들, 곧 오랜 경력의 외화 수입상들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라면 안 될 만한 요소는 다 갖추고 있는 영화로군.”

지난해 인종차별 논란
정면돌파한 아카데미
反트럼프 정치성향 표방

‘국제적 양다리’ 베를린
할리우드와 유럽 함께 품어
정치적 진보주의자 자처


그 같은 요소로 그들은 세 가지를 뽑았다. 흑인들 영화라는 것, 게다가 게이(gay) 얘기라는 것, 무엇보다 예술영화라는 것이다.흑인 감독 배리 젠킨스가 만든 ‘문라이트’는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한 10대 흑인 소년의 성장기이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주인공 샤이론은 동성애자다. 그는 운명의 끈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결국 동네 마약상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한편으로는 어릴 때부터 사랑했던 친구이자 연인인 케빈을 잊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어릴 적 둘은 달빛 아래 모래사장에서 속 깊은 키스를 나눴다.


한국 관객들이 남자 흑인들의 키스 신을 좋아할까? 그건 철저하게 각자가 가진 성적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분명한 건 국내에서의 영화 마케팅 과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K씨는 그 너머를 봤다. 이 영화는 작품이 갖고 있는 내적 에너지, 그 뛰어난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아카데미 시상식 때문에 큰 화제를 몰고 올 것이라고 봤다. K씨와 그의 스태프들은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혹은 감독상 등 주요 부문을 탈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생각은 비교적 적중했다. 이 영화는 2월 22일 국내 개봉돼 누적 관객 7만1000명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엔 그 같은 생각은 단박에 “순진한 소망에 불과한 것”이라는 핀잔을 받아야만 했다. 경쟁작으로 ‘라라랜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400명 회원이 투표로 수상자를 결정하는 행사다. 이들 아카데미 회원들은 대체로 친(親)유태계의 백인들이다. 이들이 어쩌면 지난 89년간 가장 거리를 뒀던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게이들이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아카데미 직전에 항상 열리는 LA비평가협회상에서 외국어영화상과 미술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를 이어 이 시상식에 ‘명함’을 올리지 못한 것은 영화가 ‘퀴어(Queer)’ 계열의 작품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탄다는 것은 어쩌면 턱 없는 얘기였을 수 있다. 흑인 동성애 영화라니! 
2 지난달 18일 베를린영화제 시상식에서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로 황금곰상을 받은 헝가리의 이디코 엔예디 감독(오른쪽). [AP=뉴시스, 로이터=뉴스1]

2 지난달 18일 베를린영화제 시상식에서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로 황금곰상을 받은 헝가리의 이디코 엔예디 감독(오른쪽). [AP=뉴시스, 로이터=뉴스1]

 
흑인 동성애 영화가 작품상 받은 이유
그러나 그 같은 ‘논리적’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수상 발표가 번복되는 기막힌 해프닝이 있었지만 ‘문라이트’는 ‘라라랜드’를 제치고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올해 보란 듯이 역(逆)선택을 했는데 그건 두 가지 측면에서였다. 
 
하나는 그동안 아카데미에 쏟아졌던 주된 비난, 곧 인종차별 논란을 극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지난 해인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윌 스미스, 스파이크 리 등 흑인 영화인들이 대거 불참했다. 뉴욕타임스 등에서도 “아카데미가 흑인 영화와 영화인들을 비롯해 ‘소수자(the minority)’에게 편견과 차별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올해 아카데미는 보란 듯이 ‘문라이트’를 비롯, 흑인 스타 댄젤 워싱턴이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펜시스’, 1961년 나사(NASA)에서 일했던 흑인 여성 세 명의 이야기를 그린 ‘히든 피겨스’ 등 흑인 영화들을 대거 후보에 올림으로써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을 정면으로 뚫고 나간 셈이 됐다. 
 
또 다른 역선택의 측면은, 그렇게 아카데미는 차별 없는 세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지금의 트럼프 시대를 비판하고 맞설 준비가 돼있음을 보여 준 셈이 된 것이다. 올해 아카데미만큼 시상의 내용면에서나 식의 진행 면에서 정치적 외양(外樣)을 적극적으로 표방한 적은 없었다. 
 
진행자였던 지미 키멜은 오프닝에서 이런 말로 사람들의 폭소를 이끌어 냈다. “오스카상은 지난 해 인종차별 논란을 빚었죠. 그러나 올해는 그 같은 상황이 사라졌습니다. 모두 다 트럼프 덕분입니다.”
  
영화제를, 영화들을 상영하고 사람들이 모여 깔깔 웃고 떠드는, 그렇게 ‘노는’ 행사로만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영화제 만큼 정치적인 행사도 없다. 그건 영화 자체가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아니 영화는 그 자체가 정치다. 영화는 당대의 정치적 쟁점과 이슈를 늘 자신의 소재와 주제로 다룬다. 시리아 난민 사태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해지면 이어 ‘전 세계적으로’ 그걸 다룬 영화가 쏟아지고, 다시 곧 ‘전 세계적으로’ 각종 영화제에서 이들 작품을 상영한다.
(위부터)‘문라이트’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 ‘젊은카를 마르크스’.

(위부터)‘문라이트’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 ‘젊은카를 마르크스’.

 
지난 1월 미국 유타 주 파크시티에서 열린 제33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유독 난민과 관련된 극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많았던 것도 그 같은 점을 방증한다. 영화의 불모지 급으로 여겨지는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페이크 다큐, ‘착한 우체부(A good Postman)’는 시리아를 피해 불가리아 접경으로 밀려 드는 집시들을 구제하고자 47명 밖에 안되는 동네의 시장 선거에 나서는 우체국장 얘기였다.
 
같은 맥락에서 지난 2월 김민희의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국내 언론을 온통 도배시켰던 제67회 베를린 영화제 만큼 정치적 ‘의도’가 돋보이는 행사도 찾기 어렵다.
 
베를린 영화제는 공간 자체가 정치·역사적 함의(含意)를 느끼게 만든다. 영화제 전용관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Berlinale Palast)는 포츠다머 플라츠, 곧 포츠담 광장에 있다. 여기는 동서 베를린의 경계로서 1945년 8월 윈스턴 처칠과 해리 트루먼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 등 영국과 미국, 소련의 정상이 모여 패전국 독일의 분할 통치에 대해 논의했던 곳이다. 1970년대까지 베를린 영화제가 동구권 영화를 일제 불허하며 영화제로서 동서냉전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것에는 그처럼 공간 자체가 보여주는 의미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분위기가 어마어마하게 바뀌었다. 오히려 친미(親美) 색깔을 강하게 가져가는 한편 동구권 영화들을 대거 유입시키고 그럼으로써 동시에 이른바 ‘베를린적’ 정체성을 지켜 나가려는 전략을 쓴다. 베를린 영화제는 이렇게 국제적으로 ‘양다리’를 걸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할리우드와의 관계를 통해 ‘시장=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동시에 유럽 영화권에서의 리딩 롤(Leading role)을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뜻이다.
 
올해 휴 잭맨 주연의 ‘로건’을 초청한 것은 베를린 영화제의 그 같은 속내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로건’은 ‘울버린’의 외전(外傳)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이런 영화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베를린영화제는 동시에 심사위원단 상당수를 출신과 상관없이 미국 등 북남미 대륙권에서 활동하는 영화인들로 꾸몄다. 영화감독 폴 버호벤(‘원초적 본능’ ‘블랙 북’ 등), 배우 매기 질렌할(‘다크 나이트’), 디에고 루나(‘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 등이다. 베를린영화제의 미 대륙 사랑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베를린이 미국을 안으려는 것은 상대적으로 경쟁 영화제인 칸 영화제와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칸은 유럽 영화권의 맹주로서 자신들을 중심으로 반(反)할리우드 전선을 펴려 한다. 이와 달리 베를린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미국과 시장(市場)을 공유하겠다는 속셈을 내비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베를린적 정신과 정체성, 정치적 진보주의의 선두주자 자리를 놓치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는 데, 이것이야말로 베를린의 더 큰 야심이자 야욕이기도 하다.
 
베를린, 개막작 통해 ‘수치의 역사 사죄’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 헝가리 이디코 옌예디 감독의 ‘육체와 영혼에 대하여’와 핀란드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희망의 저편’이 경합을 벌였던 것은 그 같은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두 작품은 각각 황금곰상과 은곰상을 차지했다.
 
베를린 영화제 마니아들은 아이티 출신의 라울 펙 감독이 만든 ‘젊은 칼 마르크스’에 더 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이 영화는 젊은 시절에 만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얘기다. 
 
개막작이었던 ‘장고’는 1943년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저항 운동을 펼쳤던 장고 라인하르트라는 재즈 기타리스트 얘기다. 이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택함으로써 독일이 갖고 있는 수치의 역사를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사죄하려 한 셈이다. 베를린이 아니면 그 어느 곳에서 이런 영화를 만날 수 있겠는가. 
 
베를린 영화제의 개막식에서 클라우디아 로트 독일 의회 부의장의 가슴엔 이런 뱃지가 붙어 있었다. ‘대통령답지 않은!(unpresidented!)’ 미국 도널드 트럼프가 과거 자시의 트위터 계정에 쓴 오자를 빗대어 그와 그의 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 영화제를 들여다 보면 국제 관계, 그 정치적 역학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세상사, 늘 배우고 볼 일이라는 얘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오동진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를 거쳐 지금은 전업영화 평론가로 살아 가면서 서울국제환경영화제,들꽃영화상, 마리끌레르 영화제를 총괄 운영하고있다. 영화를 보는 게 업이지만 평소에는 시간이 달려 아예 선댄스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를 가 몰아서보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여전히 신작을 볼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영화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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