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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같은 밥도 여기서 먹으면 맛있어” 쑹칭링 달래

중앙선데이 2017.03.05 01:02 521호 28면 지면보기
1 중국을 방문한 호치민(胡志明)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쑹칭링. 1955년 7월, 베이징.

1 중국을 방문한 호치민(胡志明)에게 꽃다발을 증정하는 쑹칭링. 1955년 7월, 베이징.

 혼자 사는 여인들은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을 선모(羨慕)했다. 이유가 있었다. 쑹칭링은 국부 쑨원(孫文·손문)의 부인이며, 국민정부 최고 통치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처형이었다. 중국의 재정을 좌지우지한 콩샹시(孔祥熙·공상희)가 형부이고 쑹즈원(宋子文·송자문)의 친누나이기도 했다. 쑨원 사후, 철완의 외교관 천유런(陳友仁·진우인)과 국민당 좌파 영수 덩옌다(鄧演達·등연달)의 추구를 한몸에 받았는가 하면, 신중국 선포 후에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사망 직전, 혼수상태이기는 했지만, 국가 명예주석에 추대되는 영예도 누렸다.

문혁 때 장칭이 쑹칭링 핍박할 때
음식 들고 찾아가 미안함 표시

장제스가 공산당 도살에 나서자
쑹칭링은 좌파 인사 보호 앞장


 화려한 삶이었지만 애환도 그치지 않았다. 저마다 잠룡(潛龍)으로 착각하는, 잡룡(雜龍)들의 유희에 익숙한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얘기는 국민당 창당시절로 되돌아간다.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가 뒤섞인 정당이었다. 지주와 토호 등 봉건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을 우파라 일컬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국민당 우파는 외국자본 언저리를 배회하며 지주와 노동자, 농민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특징이 있었다. 민족지상과 군사독재를 주장하며민중 정권에는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좌파는 그 반대였다. 군벌세력 타도를 위해 공산당과 합작했다. 쑨원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큰 혼란은 없었다.
 
 쑨원이 세상을 떠나자 분열이 시작됐다. 쑹칭링은 쑨원의 후계자였던 랴오중카이(廖仲凱·요중개),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와 함께 국민당 좌파를 대표했다. 쑨원의 유산인 국·공합작의 유지를 주장했다. 남편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자신에게 청혼했던, 장제스가 정변을 일으켰다. 왕징웨이마저 호응하자 국민당 좌파는 기본적으로 와해됐다.
 
 장제스가 공산당 도살에 나서자 쑹칭링은 좌파 인사 보호에 나섰다. 죽음을 피한 사람들은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거나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 와중에 랴오중카이는 암살당하고, 쑹칭링은 천유런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장제스와 함께 황푸군관학교(黃?軍官學校)를 대표하던 덩옌다도 뒤를 따랐다. 스탈린은 쑹칭링 일행을 애물단지 취급했다.
 
 모스크바에서 방황하던 중 동생 메이링과 장제스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이어서 자신이 천유런과 재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국부 쑨원과 결별시키려는 장제스의 꼼수에 분노했다. 혼자 독일로 갔다. 프랑스에서 장징장(張靜江·장정강)의 딸과 결혼한 천유런도 쑹칭링을 실망시켰다. 왕징웨이의 초청에 응해 중국으로 돌아가 외교부장에 취임했다.
 
 소련에서 귀국한 덩옌다는 천유런과 달랐다. 장제스 타도를 내걸고 무장폭동을 도모하다 체포됐다. 덩옌다와 장제스의 성격을 잘 알던 쑹칭링은 귀국길에 올랐다. 장제스 찾아가 구명에 나섰다. 장제스도 처형의 애청을 흘리지 않았다. 덩옌다에게 제휴를 제의했다. 쑹칭링의 안부를 전해도 막무가내였다. 장제스는 넌덜머리가 났다. “한때 우리는 쑨원 선생 밑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북벌전쟁시절 너는 청사에 남을 업적을 세웠다.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다.” 덩옌다의 처형 소식을 들은 쑹칭링은 가슴을 쥐어 뜯었다. 1944년 일본의 회유를 거부하던 천유런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공 정권 수립 후 국가 부주석 쑹칭링은 매사에 초연했다. 하나마나 한 평화운동과 아동복지운동을 펼치며 정치와는 일정한 선을 그었다. 가는 곳마다 대접받고 중국을 예방한 외국 국가원수들도 쑹칭링 예방은 빼놓지 않았다.
2 1961년 8월 18일 오후 저우언라이(왼쪽 둘째)와 함께 쑹칭링의 거처를 방문한 가나공화국 대통령 엥크루마(왼쪽 넷째) 앞에서 조선무(朝鮮舞)를 추는 수이융칭. [사진=김명호 제공]

2 1961년 8월 18일 오후 저우언라이(왼쪽 둘째)와 함께 쑹칭링의 거처를 방문한 가나공화국 대통령 엥크루마(왼쪽 넷째) 앞에서 조선무(朝鮮舞)를 추는 수이융칭. [사진=김명호 제공]

 
 쑹칭링은 1957년, 64세 때 경호원의 딸 수이융칭(隋永淸·수영청)을 품에 안았다. 비서의 회고를 소개한다. “적적했던 쑹칭링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2년 후, 베이징에 갈 때 두 살배기 융칭을 수행원 자격으로 데리고 갔다. 융칭은 장난이 심하고 화를 잘 냈다. 높은 창틀에 매달려 노래 부르는 등 비서들에게 애를 먹였다.” 미국유학시절, 민주주의 세례를 받은 쑹칭링은 융칭을 방목시켰다. 겁이 없다며 걱정하는 비서들을 달랬다. “애들은 어릴수록 겁이 없고 용감한 법이다.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조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융칭이 말을 깨우치자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말을 했다. “여자는 자신을 장식할 줄 알아야 한다. 커서 남자를 사귀게 되면 사랑은 책임이라는 것을 하루도 잊지 말라”며 머리도 직접 다듬어주고 좋은 옷만 입혔다. 쑨원에 대한 회상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 어떤 사람도 쑨원 선생만 못했다. 선생은 책임을 질 줄 알았다. 국민을 실망시키지도 않았다.”
 
 형제 자매와 결별하고 대륙에 남은 이유도 설명했다. “쑨원 선생은 소련과 공산당과의 연합을 제창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도살했다. 선생을 배신한 중화민국의 반역자다. 중공은 쑨원의 정신을 존중했다.”
 
 문혁시절 장칭(江靑·강청)은 쑹칭링을 핍박했다. 그럴 때마다 마오쩌둥은 먹을 것 들고 쑹칭링을 방문했다. “같은 밥도 여기서 먹으면 맛이 있다”는 말로 미안함을 대신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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