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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독살 사건으로 주목받는 말레이시아] 아시아 최초 저비용 항공사, 박지성 광고 모델로 나서기도

중앙일보 2017.03.05 00:02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인도 거리.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인도 거리.

북한 통치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2월 13일 독살로 추정되는 암살을 당하면서 말레이시아가 새삼 주목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여행을 떠나는 휴양지로 유명한 이 나라는 사실 동남아시아의 떠오르는 별 중의 하나다. 차분하고 과학적이며 효율적인 말레이시아 경찰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 이 나라는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현대국가로 정치적·경제적 자존심도 강하다.
 

다인종·다종교 국가 … 독립 초기엔 민족 융합책 펴다 차별 정책으로 선회

경제적으로도 말레이시아는 상당한 실력을 갖췄다. 국내총생산(GDP)은 명목금액 기준으로 2016년 국제통화기금(IMF) 추정치가 3079억 달러에 이른다. 인구가 2억 명인 파키스탄(2710억 달러) 1억 명인 필리핀(3116억 달러), ‘아시아의 용’이라던 도시 국가 홍콩(3160억 달러)과 싱가포르(2966억 달러)와 비슷하다. 아프리카의 맹주로 주요 신흥시장으로 분류되는 인구 5500만의 남아프리카공화국(2803억 달러)에도 밀리지 않는다.
 
말레이시아의 경제적 자존심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명목금액 기준으로 1인당 GDP는 2016년 IMF 통계상 9501달러다. 구매력 기준(PPP)으로 살펴보면 GDP는 8598억 달러, 1인당 GDP는 2만7278달러에 이른다. 원래 고무·주석 수출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과거지사일 뿐이다. 한때 고무 수출로 번 돈으로 서울 이태원의 이슬람사원 건축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제는 다양한 산업을 유치해 산업국가로 거듭나고 있다. 관광으로도 유명하다. 수도 쿠알라룸푸르는 몇 달~몇 년식 살아보는 여행을 즐기는 서구인들 사이에서 선호 도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민족 갈등이 불러일으킨 5·13 폭동
에어아시아(AirAsia)의 토니 페르난데스 회장이 2012년 1월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축구 선수 박지성에게 항공기 모형을 전달하고 있다. 당시 에어아시아는 박지성을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에어아시아(AirAsia)의 토니 페르난데스 회장이 2012년 1월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축구 선수 박지성에게 항공기 모형을 전달하고 있다. 당시 에어아시아는 박지성을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눈여겨볼 점은 민족과 종교 구성이 대단히 복잡하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1.3배가 넘는 33만 평방킬로미터의 국토에 2017년 추정치로 3140만의 인구가 사는데 민족과 종교가 다양한 다민족·다종교 국가다. 전체 인구의 50.1%가 말레이계이고 11.8%가 토착 비말레이 종족이다. 이 둘을 합쳐 ‘대지의 아들이라는 뜻’의 ‘부미푸테라’로 부른다. 이들이 말레이시아 땅의 토착민으로 핵심 정치 세력이다. 말레이족은 이웃 인도네시아와는 같은 말레인도네시아어를 쓰는 데다 종교도 같은 이슬람이라 교류가 활발하다. 나머지는 이주자의 후손이다. 


22.6%가 화교이고 6.7%는 타밀족 등 인도계다. 종교를 보면 61.3%가 수니이슬람이다. 말레이계와 비말레이 종족을 합친 부미푸테라의 비율과 거의 일치한다. 19.8%가 불교도인데 대부분 화교다. 9.2%는 기독교도인데 중국인 중에서도 기독교도가 적지 않다. 6.2%가 힌두교도로 인도계 인구와 엇비슷하다. 이들 중국계와 인도계는 과거 무역풍을 타고 본국과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무역을 하다 정착했거나 19세기 초 식민지 종주국 영국의 필요에 의해 노동 이민한 주민의 후손이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 당시 동남아시아의 영국 식민지는 지리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말레이 반도와 보르네오섬 북부의 북부르네오, 그리고 보르네오섬 서북부의 사라와크, 그리고 말레이반도 남부의 섬인 싱가포르로 나뉘어져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이를 모두 합쳐 연방을 구성했다. 연방은 1963년 9월 16일 결성됐다. 하지만 갈등 속에 싱가포르 지도자 리관유는 1965년 연방에서 탈퇴했다. 말레이시아는 떠나는 리콴유를 잡지 않았다. 말레이계의 자존심이자 화교들이 정치 분야에서 득세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다민족 국가다 보니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말레이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1969년 5월 13일 발생했던 최대 도시이자 현재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서 벌어졌던 말레이계와 중국계 사이의 인종 충돌 폭동이었다. 말레이시아 사상 최대의 민족 충돌 사건으로 기록된다. 폭동은 불과 하루 만에 끝났지만 총격과 방화 같은 폭력사태는 계속돼 사건 발생 뒤 며칠 동안 불안이 계속됐다. 그 결과 사망자 196명,부상자 439명이 발생했다. 말레이시아 화교들은 이를 ‘5·13 폭동’이라고 부른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초기에는 민족 융합 정책을 폈다. 말레이시아 건국의 아버지인 라만은 독립 이후 민족 정책에서 기본적으로 ‘현상유지’ ‘자유방임’ 정책을 폈다. 말레이계와 중국계, 인도계로 이뤄진 말레이시아에서 정치적으로 민족 융합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바탕으로 독립 직전부터 말레이계의 통일 말레이국민조직(UMNO)와 중국계의 말레이시아화인협회(MCA), 말레이시아인도인협회(MIC)으로 국민전선을 조직하고 연립정권을 구성했다.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세웠다. 말레이시아 국부다운 노회하고 성숙한 정치력이었다.
 
하지만 UMNO의 말레이계 차세대 지도자 그룹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라만의 민족 유화 정책에 불만이 팽배했다. 이들의 가장 불만은 말레이계 주민의 경제력이 화교들과 비교해 지나치게 빈약하다는 점이었다. 이를 정치적으로 보장까지 해주면 말레이계는 빈익빈을 겪게 되고 화교들은 부익부를 누리게 된다는 게 이들의 논리였다. 
 
말레이계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상황을 변화시키고 싶어했다. 말레이계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민족 유화 정책부터 포기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에 따라 말레이계에 우대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결과 말레이계가 내각 농촌부의 개발사업이나 상공업부문에 참가할 때 지원하는 방안이 포함된 제2차 6개년 계획(1961~65)를 시작하게 됐다. 라만이 노쇠해지면서 UMNO서 발언권이 약화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5·13 폭동 발생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였다. 말레이계에 대한 경제적 우대 정책에 대한 반발과 공용어 선정 문제였다. 말레이계는 헌법 153조에 말레이어를 공용어로 하는 내용을 삽입했는데, 1957년 교육령을 발표하면서 중등학교 이하에서 중국어 교육을 계속할 것인가를 분명히 정하지 않아 중국인의 불만이 고조됐다.
 
70년대부터 중국계 차별 정책 펴
말레이시아 정부는 1971년부터 더욱 노골적인 중국인 차별 정책에 나섰다. 이를 위해 신경제정책이란 것을 내놨다. 경제권을 장악한 중국계의 횡포에 맞서 말레이계의 경제 형편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기업 경영이나 대학 입학에서 말레이족 우대정책을 폈다. 이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간 집권한 마하티르 총리의 재임기간 중 더욱 노골화했다. 
 
1980년대 당시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신자유주의경제의 영향을 받아 규제 완화와 공기업의 민영화를 대대적으로 하면서 경제활동의 기회를 말레이족에게 몰아준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 매년 50개 정도의 국영기업을 민영화했는데 노른자위는 말레이족에게 갔다. 이렇게 중국계를 견제하고 말레이계를 우대하면서 마하티르와 UMNO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말레이족과 다른 원주민의 정치적 지지를 받아 정권을 계속 안정적으로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런 마하티르는 집권 말기에 새로운 고민에 부딪히게 됐다. 말레이계와 화교에 이은 말레이시아 제3의 민족인 타밀계였다. 김정남이 사고 당일 말레이시아에서 마카오로 가기 위해 예약했다는 말레이시아 저가항공사 에어아시아는 타밀계 기업인이 창업해 운영한다. 말레이시아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 항공사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에어아시아의 창업과 성공은 말레이시아의 내부 정치, 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에어아시아가 어떤 항공사인지 살펴보자. 1993년 12월 20일 설립돼 1996년 11월 16일 첫 비행을 한 이 항공사는 현재 타이에어아시아, 인도네시아에어아시아, 에어아시아재팬, 필리핀에어아시아, 에어아시아X, 타이에어아시아X, 인도네시아에어아시아X 등 8개의 자회사를 운영하며 동남아시아 대부분에서 영업한다. ‘X’가 들어간 업체는 장거리 운항을 전문으로 하는 자회사다. 
 
현재 본사만 8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자회사를 포함해 전 세계 72개 지역을 잇고 있다. 직원이 1만7000명에 이른다. 지난해 1~3분기 영업실적을 보면 11억2000만 달러 매출에 3억5400만 달러의 세전 이익을 냈다. 실적도 괜찮고 대단히 빠른 속도로 성장해온 기업임을 알 수 있다.
 
이 회사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토니 페르난데스(53) 아시아에어 회장을 보면 말레이시아라는 나라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그는 말레이시아의 제3 민족인 인도계 타밀족이다. 이름만 보면 서구 사람으로 착각하기 쉽다. 전체 이름은 앤서니 프랜시스 페르난데스인데, 애칭은 토니로 줄여 부른다. 
 
포브스에 따르면 그는 6억5000만 달러의 재산으로 말레이시아 부자 순위 28위에 올랐다. 동남아에서 가장 힘 있는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 통하는 그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저가항공 사업을 시작해 궤도에 올렸다. 에어아시아는 현재 아시아 최대의 저비용항공사다. 이 항공사는 페르난데스가 2001년 인수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저비용항공사로 탈바꿈했다.
 
마하티르가 밀어준 토니 페르난데스
마하티르 빈 모하맛 전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맛 전 말레이시아 총리.

영국에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런던정경대(LSE)를 졸업한 그는 유학 중 경험한 저비용항공사인 버진애틀랜틱에서 영감을 얻고 고국 상황에 맞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해 아시아 최초의 저가항공사를 설립할 꿈을 키웠다. 하지만 1990년대에 말레이시아 정부로부터 항공사업권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민간항공사도 드문 말레이시아에서 유럽에나 있는 저비용항공사를 만들겠다는 제안에 선뜻 허가를 내주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항공 여행을 하나의 특권으로 생각하던 1990년대에 기내식도, 무료 음료도, 신문·잡지도 제공하지 않는 대신 비용을 절약해 가격을 낮춘다는 저비용 항공 모델은 상상하기도 힘든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이에 따라 유럽에서나 가능한 모델이자 아시아에서는 무리라는 인식이 강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아시아 최초의 저비용 항공사는 이렇게 조건이 열악한 말레이시아에서 시작됐다. 계기는 뜻밖에도 마하티르 총리와의 만남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인맥을 이용해 2001년 10월 마하티르 총리를 만났다. 저비용 항공사에 대한 그의 구상을 들은 마하티르에게 창업보다 기존의 항공사를 인수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마하티르가 말한 회사가 바로 ‘에어아시아’였다. 지금 에어아시아와는 이름만 같지 다른 종류의 회사였다. 당시 에어아시아는 말레이시아의 국영 대형기업으로 자동차, 중공업, 부동산, 서비스업 등을 운영하던 디알비 하이콤(DRB-HICOM)의 자회사였다. DRB-HICOM은 현재 일본의 혼다. 스즈키,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 폴크스바겐, 인도의 타타 등 자동차 업체의 완성차를 말레이시아 내에서 조립하는 국영 기업이다. 
 
당시 에어아시아는 경영난으로 부채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페르난데스는 빚을 떠안는 조건으로 보잉 737-300 여객기 두 대를 포함해 에어아시아를 단 돈 1링깃(약 316원)에 매입했다. 그런 다음 전직장 퇴직금을 포함해 그동안 모은 돈, 그리고 집을 담보로 대출 받은 자금을 전부 에어아시아에 추가 투자했다. 그가 운영하면서 에어아시아는 빠르게 경영이 정상화됐다. “이제 누구나 비행기를 탈 수 있어요(Now everyone can fly)”라는 이 회사의 구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는 수많은 잠재 고객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국민 중 비행기를 타본 사람은 전체 인구의 6%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매입 1년 뒤 기존의 빚은 모두 청산했다. 2004년에는 상장까지 했다.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중에서 인도계에서 경제적 스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중국계를 견제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다민족 사회를 통치하는 노련함이다. 마하티르가 페르난데스에게 에어아시아를 넘긴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인도계가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을까. 말레이시아를 식민지로 경영하던 영국은 19세기에 또 다른 식민지였던 인도 남부에 살던 타밀족을 말레이시아에 노동 인력으로 데려왔다. 부지런하고 노동 숙달 능력이 뛰어난 타밀족은 당시 실론 섬의 차 농장 등 다양한 영국 식민지 산업 현장에 노동 인력으로 이주했다. 
 
힌두교도인 타밀족은 본고장인 인도에 6000만 명이 살고 있다. 영국이 이주시킨 주민의 후손이 스리랑카에 320만 명, 말레이시아에 150만 명 이상이 각각 거주한다. 말레이시아에선 타밀 족이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무장 봉기를 했했다가 정부군에 진압되기도 했다. 의사인 페르난데스의 아버지는 바로 이 인도계 타밀 족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소규모 인종 집단이 수두룩하다. 16세기부터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인의 후손도 상당수 있다. 페르난데스의 어머니가 여기에 해당한다. 스페인계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성 페르난데스는 포르투갈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비즈니스 감각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페르난데스는 2011년 잉글랜드프리미어 리그 소속의 축구팀 퀸스파크 레인저스를 인수했다. 이런 인연으로 당시 퀸스파크 레인저스 주장이던 박지성 선수가 잠시 에어아시아 광고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인도 출신으로 영국 최고의 부자인 철강 왕 락시미 미탈 아르셀로미탈철강 회장도 이 축구팀에 투자했다.
 
미탈의 투자는 같은 인도계 뿌리가 있는 페르난데스의 설득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성적이 좋지 않아 2부로 밀려나면서 회사도 팔았지만 인도계 인맥은 남았다. 다민족 국가 말레이시아가 중국은 물론 인도와도 네트워킹을 통해 경제 협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말레이시아의 가능성이다. 중국과 인도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말레이시아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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