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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앤드루 가필드, 수퍼 히어로에서 연기파로

중앙일보 2017.03.05 00:02
앤드루 가필드(33)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당장 고쳐져야 한다. 수퍼 히어로 혹은 잘생긴 청년 스타로 불리던 그는, 지금 전혀 다른 얼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사일런스’(2월 28일 개봉), 멜 깁슨 감독의 ‘핵소 고지’(2월 22일 개봉)의 그 절절한 연기를 보라. 배우의 성장, 연기 변신, 작품을 고르는 안목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향후 몇 년이고 그의 이름을 호명하게 될 테다. 괜한 호들갑이 아니다. ‘사일런스’와 ‘핵소 고지’의 가필드를 지켜본 자의 강한 확신이다. 

‘사일런스’ ‘핵소 고지’ 앤드루 가필드


대체 앤드루 가필드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요즘 그의 행보는 여러모로 놀랍고 흥미롭다. 지난 1월. 아카데미 시상식은 올해 남우주연상 후보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어려웠던 일이다. 가필드 명성의 8할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012, 마크 웹 감독)에서 왔다. 전 세계 7억5000만 달러(약 8600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린 이 영화(그의 이전까지 출연작 흥행 수입을 모두 합친 것보다 큰 액수다)를 통해 부와 인기를 얻었다. 다만 그는 수퍼 히어로의 얼굴이었지, 오스카 연기상감이라곤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뜻밖의 전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하차한 그의 다음 행보는 프랜차이즈 액션영화도 로맨틱 코미디영화도 아니었다. 가필드는 2015년 두 편의 영화에 임했다. 그것도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약 30년간 공들인 ‘사일런스’와 10년 만에 연출자로 복귀한 멜 깁슨 감독의 신작 ‘핵소 고지’에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두 감독은 가필드에게 깊이 매료됐고, 가필드는 그 믿음에 완벽히 보답했다. 미국에서 지난해 하반기 공개된 두 영화가 지금 우리 앞에 나란히 도착해 있다.
 

신념을 연기한 두 영화
 
‘사일런스’와 ‘핵소 고지’를 관통하는 주제는 신념이다. ‘사일런스’는 탄압받는 신부(神父)를 통해, ‘핵소 고지’는 불지옥의 전쟁 통에서 신념을 그린다. 영화의 장르도 그렇지만, 가필드가 연기하는 캐릭터만 봐도 두 영화는 묘하게 엇갈린다. ‘사일런스’는 자신의 신념을 의심해 본 적 없는 자의 분열 과정을, ‘핵소 고지’는 신념을 통해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가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일런스’에서 가필드는 가톨릭 박해가 극에 달한 17세기 일본에서 곤경에 처하는 신부 로드리게스를 연기했다. 이 영화에는 침묵하는 신(神)의 시선처럼 보이는 부감숏과 함께 로드리게스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배교(背敎)를 강요하는 일본의 압박, 자신으로 인해 신자들이 고문·학살당하는 참혹한 광경 속에서 그의 표정은 조금씩 일그러진다. 거의 모든 빛을 차단한 채 로드리게스의 얼굴만으로 그 고통스러운 심정을 보여 주는 스코세이지 감독의 과감함도 놀랍지만, 그걸 가능케 한 가필드의 진중한 연기 또한 경이롭다. 누군가 세상 고난을 짊어진 자의 표정이 어떠한지 묻는다면, “‘사일런스’의 가필드를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고난의 순간, 신은 어디 계신가?’라는 종교적 딜레마가 그의 얼굴에서 여실히 읽힌다.
 
극 중 절정의 순간은, 후반부 로드리게스가 스승 페레이라(리암 니슨) 신부와 독대해 논쟁하는 장면이다. 줄곧 절제돼 있던 로드리게스의 감정은 배교한 스승과 마주한 대목에서 격정적으로 타오른다. 여기서 리암 니슨과 팽팽히 대립하는 가필드의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가필드에 대해 니슨은 이렇게 말했다. “사려 깊고, 자신의 역할에 매우 몰입하는 배우다. 로버트 드 니로, 대니얼 데이 루이스처럼. 가필드는 제대로 된 배우다.”
 
‘핵소 고지’에선 무기 없이 75명의 생명을 구한 전쟁 영웅 데스몬드 도스를 연기했다. 이 영화의 가필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용기와 아이 같은 순수함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포레스트 검프’(1994,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톰 행크스를 떠올리게 한다. 검프(톰 행크스)처럼 도스 역시 모든 일에 망설임이 없다.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도, 전쟁터에 나가서도 앞만 보고 달린다. 가필드는 도스의 일대기를 그리며 극명히 다른 두 얼굴을 보여 준다. 극 초반 극장에서 도로시(테레사 팔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도스의 얼빠진 표정(남자가 사랑할 때 지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표정이다)은 순수하기 그지없다. “한 명만 더 살릴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말하는 극 후반의 신념에 찬 얼굴은 그 반대로 강직함 그 자체다. 순수와 신념, 그 극단은 결국 통한다는 이치를 가필드는 몸소 보여 줬다.
 
소년을 벗어던지다
 
‘사일런스’의 스코세이지 감독은 가필드를 가리켜 “준비된 배우였다”고 말했다. 이는 ‘궁지의 청춘’으로 요약되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두고 한 말 아닐까. 돌이켜 보면 영화 속 가필드는 늘 불안과 신념, 소년과 어른의 경계, 그 어디쯤에서 주저하는 청춘이었다. ‘보이A’(2007, 존 크로울리 감독) 속 잔혹한 과거를 품은 소년 전과자, ‘네버 렛 미 고’(2010, 마크 로마넥 감독)에서 장기 기증을 위해 키워진 클론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한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 역시 평범한 소년과 영웅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복면을 벗고 스스로 제작한 영화 ‘라스트홈’(2014, 라민 바흐러니)에서도 가필드는 기꺼이 곤경에 처했었다. 미국 부동산 대공황 사태를 다룬 이 영화에서 가필드는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집을 부숴야만 하는 부동산 브로커로 등장한다.
 
가필드의 소년 같은 얼굴, 환한 미소, 착한 눈빛 한편에는 슬픔과 고뇌가 얼비친다. 투명하고 고운 반면 조금만 힘줘도 부스러질 유리 조각처럼 여리고 약하다. 아마도 스코세이지 감독과 깁슨 감독은 그 묘한 공존에 끌렸을 게다.
 
가필드는 데뷔한 지 약 10년 만에 거장 감독들이 찾는 배우로 성장했다. 지금의 그는, 스코세이지 감독을 만나 배우 인생 제2막을 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 장 마크 발레 감독)을 통해 섹시 스타에서 연기파 배우로 거듭난 매튜 맥커너히를 연상케 한다. 터닝 포인트를 지나 이제 막 하이라이트에 접어든 젊은 배우의 질주가 몹시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가필드의 다음 영화는 미국 LA를 배경으로 한 범죄 누아르영화 ‘언더 더 실버 레이크’(데이비드 로버트 미첼 감독)다. 실화 소재의 영화 ‘브리드’도 촬영 중이다. 배우 앤디 서키스가 연출을 맡은 이 영화에서 가필드는 소아마비로 인한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로빈을 연기한다. 휠체어에 앉아 애틋한 표정으로 미소 지을 그가 벌써 눈에 아른거린다.
 


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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