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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사법화가 두 동강 갈등 불렀다

중앙선데이 2017.03.05 00:02 521호 1면 지면보기
정파적 이익 때문에
정치적 해법 회피→사법부 결론→ 패자 반발 → 갈등 확대 악순환

타협의 해결사 돼야 할 국회
자기 스스로 무능함을 증명

사법부는 여론 눈치 살피며
책임 미루는 폭탄 돌리기

헌재 보내놓고 불복은 말 안 돼
박 대통령, 승복 설득 나서야

[할아버지 따라, 아빠 따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임박한 가운데 4일 오후 서울 도심에선 태극기집회(왼쪽)와 촛불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김성룡 기자

[할아버지 따라, 아빠 따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가 임박한 가운데 4일 오후 서울 도심에선 태극기집회(왼쪽)와 촛불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김성룡 기자

 
4일 오후 서울 도심은 지난 수개월 동안과 마찬가지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반을 두고 입장이 갈린 시민들로 가득 찼다.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선고를 앞둔 사실상 마지막 주말인 탓에 집회 참가자 수는 올 들어 가장 많았다. 연단에 선 이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날이 서 있었다. 헌재 결정 이후 상황에 대해 ‘불복’을 외치는 주장도 극에 달했다. ‘태극기집회’ 측에선 “탄핵이 인용되면 피 흘려 승리를 쟁취하자”는 주장이, ‘촛불집회’에선 “기각되면 투쟁이다”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정국 수습의 계기가 돼야 할 박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한 헌재의 결론이 나라를 두 동강 내는 ‘뇌관’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양 진영 모두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올 경우 ‘강력 투쟁’을 예고하고 있어서다. 공식적으로 승복하겠다고 밝힌 정치인들도 이날 집회에 대거 참석함으로써 이 같은 불복 우려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갈수록 거세지는 광장과 정치권의 ‘불복 정서’ 이면엔 ‘정치의 사법화(judicialization of politics)’라는 한국 정치의 고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진단한다.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적 사건을 사법부에 보내 해결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법대로 하면 명확한 결론이 나온다는 이점도 있지만 승패가 무조건 갈리는 사법적 판단의 특성상 결론이 난 이후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키우는 부작용도 크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법 과정에선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나온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윈윈을 추구할 수 있는 정치와는 달리 누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그만큼 손해를 보는 제로섬 게임이라서다. 승자독식 구조 아래에서 패자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고 갈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민주화된 사회에선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한국 정치권의 경우 그 정도가 지나치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건, 신 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사건을 필두로 국가보안법 독소조항 위헌 문제, 미디어법·간통죄 폐지 문제 등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찾아냈어야 할 해결책들을 헌재가 법전에서 찾도록 떠밀었다. 결국 정치·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국회의 회피→사법부 결론→패자 반발→사회적 갈등 확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마저 생겼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최종적 정치·사회 갈등의 해결사가 돼야 할 국회가 자기 스스로 무능을 증명하고 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꾸 사법부로 가져가다 보니 국회의 권위는 실추되고 갈등은 커진다”고 설명했다.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사법의 정치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법과 원칙대로 판결해야 할 사법기관들이 여론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걸 말한다. 법조계에서 회자되는 이른바 ‘폭탄 돌리기’ 이론이 대표적이다. 정치적 사건이 사법부에 오면 소신대로 판결하기보단 욕먹지 않는 방향으로 판단을 하고 검찰은 법원에, 1심은 항소심에, 항소심은 대법원에 책임을 미루는 현상이다. 그러는 사이 갈등은 증폭된다. 법관 출신의 한 대형로펌 변호사는 “정치적 사건은 비난의 강도가 너무 크다. 그러다 보니 욕을 안 먹기 위해 무리한 판단을 내릴 우려도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번 박 대통령 탄핵사건도 정치적으로 해결했다면 혼란이 덜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정치권에서 대화를 통해 안정적 해결책에 합의했다면 지금처럼 몇 달째 온 국민이 소모적 찬반 논쟁에 매달리는 일도, 헌법재판관들의 성향을 둘러싸고 온갖 비방과 추측이 난무하는 일도, 나라가 두 동강 날 사태의 수습을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 상황에도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불거진 지난해 10월 말 이후 박 대통령과 정치권에 해법을 찾을 기회가 몇 차례 있었다. 박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해 “국회가 추천한 총리를 임명해 달라는 야권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야권은 이를 거부했다. 11월 말에는 박관용 전 국회의장 등 원로들이 ‘4월 퇴진, 6월 대선’ 방안을 제시하고 박 대통령이 3차 담화로 “임기 단축,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고 했을 때도 야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대통령도 수백만 시민이 촛불을 들고 나왔을 때 야권의 요구를 무시한 경우가 많았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질서 있는 퇴진’ 논의 등 정치적 해법이 있었지만 여야 모두 정파적 이익을 우선하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다”고 지적했다.
 
결국 정치권이 자초한 문제인 만큼 사태 수습도 정치권이 먼저 나서야 한다. 직접적 이해당사자들이 갈등 완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진영 논리를 떠나야 한다. 보수 세력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됐지만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 아닌가. 박 대통령부터 나서서 갈등 완화를 위해 어떤 결과에도 승복하자는 얘기를 꺼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명호 교수는 “정치인들이 결론을 헌재에 맡겨 놓고 불복 얘기를 꺼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행위다. 정파적 이해를 떠나 공동체를 수호하자는 관점에서 각자의 지지층에 적극적으로 자제와 승복을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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