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심각한 음악이지만 따뜻한 연주

중앙선데이 2017.03.05 00:02 521호 27면 지면보기
잉마르 베리만 영화에 사용한 캐비 라레타이 피아노 연주 모음집.

잉마르 베리만 영화에 사용한 캐비 라레타이 피아노 연주 모음집.

가끔이지만 재킷이 마음에 들어 음반을 사는 경우가 있다. 스웨덴 레이블 프로프리우스의 음반들을 듣고 뛰어난 연주와 녹음에 매료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만난 것이 캐비 라레타이(Kabi Laretei, 1922~2014)의 피아노 연주집이다. 거친 입자의 흑백사진에 눈길이 갔다. 여자가 피아노를 치고 남자는 닿을 듯 가까이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an die Musik : 모차르트 판타지 K.475

30년 경력 보도사진기자의 눈에 잘 찍은 사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여자가 뒷모습인 데다 남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악보도 무슨 음악인지 분명치 않다. 그런데 분위기가 독특하다. 조건 없는 신뢰라고 할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마음이 손에 잡힐 것 같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으나 주저 없이 주문했다.
 
남자는 스웨덴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 여자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2차 대전 때 스웨덴으로 망명한 피아니스트 캐비 라레타이다. 둘은 1959년에 결혼해 아들을 낳고 살았다. 60년대 후반에 이혼했으나 베리만은 평생 영화음악에 대해 라레타이의 자문을 구했다 . 재킷의 사진은 영화에 쓸 음악을 라레타이가 연주하고 베리만은 장면 구상에 몰두하는 모습이다.
 
음반은 라레타이가 베리만의 영화를 위해연주한 음악을 모은 것이다. 첫 곡이 모차르트 판타지 K.475다. 사진에 끌리기도 했지만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북유럽의 여성 피아니스트는 이 특별한 곡을 어떻게 연주할지 궁금했다. 스페인 여성 알리시아 데 라로차는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무겁게 연주하고, 일본 여성 미츠코 우치다는 슬픔을 하나하나 짚듯 건반을 누른다.
 
모차르트 판타지 K.475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빌헬름 켐프의 모차르트 소나타 음반에 들어 있었는데 워낙 유명한 K.331(터키행진곡)과 K.310 사이에 끼어 있어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듣고는 심장이 툭 떨어졌다. 곡을 쓸 무렵 모차르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알아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간이 어떤 심경일 때 이런 소리를 내는지 짐작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K.475는 ‘판타지(환상곡)’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판타지는 여러 음악가들이 꾸준히 작곡해 왔지만 뚜렷한 장르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소나타라든지 연습곡 또는 즉흥곡, 야상곡 등으로 이름 붙이기 힘든 곡에 환상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버린 자식 취급해서는 안 된다. 환타지는 한 작곡가의 대표곡인 경우도 있다.
 
바로크 시대의 바흐도 환상곡을 지었다. 그의 건반음악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BWV.903이 그것이다. 연주를 들어보면 마음이 출렁이는 대로 허공에 소리를 흩뿌린다. 악상이 워낙 자유로워 전주곡, 파르티타 등의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후반부 푸가가 연주되어야 비로소 바흐적 질서가 회복된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3번은 ‘환상곡풍’이라고 부르는데 악장의 순서나 각 악장의 구성이 다른 곡에 비해 특히 자유롭기(무질서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슈베르트는 유명한 ‘방랑자 환상곡’ D.760을 남겼지만 나는 썩 좋아하지 않는다. 요란한 스타트가 슈베르트답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네 손을 위한 환상곡’ D.940을 가끔 턴테이블에 올린다. 슈베르트가 흠모하는 제자 카롤리네에게 헌정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피아노 한 대에 두 사람이 붙어 앉아 연주하는 곡이다. 가만가만 시작되지만 곧 뜨거운 정열이 분출된다. 슈베르트는 제자와 나란히 앉아 갈망을 감추고 가끔 손을 부딪쳤을 것이다. 내 음반에는 라두 루푸와 머레이 페라이어, 두 남자가 연주하는 사진이 실려 있는데 영 어울리지 않는다.
 
슈만의 ‘환타지’ Op.17는 그의 피아노곡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연인 클라라에 대한 사랑과 좌절이 명작을 탄생시켰다. 쇼팽의 대표곡 중 하나인 ‘즉흥환상곡’ Op.66은 돈 많고 공부 잘 하고 얼굴까지 미남인 남자처럼 완벽하다. 환상곡은 이처럼 바로크부터 낭만까지 많은 명작이 있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나에게는 모차르트 K.475였다.
 
베리만은 어느 날 전처 라레타이에게 전화를 건다. “저, 힘들겠지만 말이지, 좀 부탁해. 장면은 이런 거야. 한 여자가 여름날 저녁 콘서트를 가.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데서 열리는. 모차르트 환타지가 연주되고, 여자는 음악에 푹 빠져. 그리고 자살을 해….”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음악으로 베리만은 모차르트 K.475를 고른 것이다.
 
그러나 라레타이의 연주를 들어도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라로차처럼 무겁거나 우치다처럼 아프지도 않다. 심각한 음악이지만 따뜻하다. 슬픔에 빠진 모차르트를 위로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모차르트 환타지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