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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TALK] 작은 영웅 전성시대

중앙선데이 2017.03.05 00:02 521호 29면 지면보기
TV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닭싸움을 시작하자마자, 벽으로 공중부양하듯 내동댕이쳐지는 남자(공비서ㆍ전석호 분)의 아련한 표정을 보고서. 해병대 출신 남자를 내친 상대는 그의 가슴팍에 닿을까 말까 한 키의 여자다. 슬로우 모션으로 날아가는 남자를 아우르는 건 음악.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Lasciachio pianga (나를 울게 하소서)’였다.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나를 울게 내버려 두세요. 비참한 운명)-.’
 

드라마 '김과장'과 '힘쎈 여자 도봉순'의 인기 비결은

소위 '병맛' 코드가 가미된 듯한 이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JTBC.사진)’이다. 국민 여동생으로 손꼽히던 배우 박보영이 주인공 도봉순을 연기한다. 슈퍼파워 걸인 그는 앙증맞은 키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경운기를 지푸라기처럼 들었다 놓는다. 모계 유전으로 내려오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캐릭터여서다. 도봉구 도봉동에 사는, 연약해 보이는 고졸 백수 여자는 매력적이다. 그녀는 ‘쫄지’ 않는다. 동네 깡패를 만나 주먹 한 방에 상대의 얼굴을 함몰시킬 수 있는 괴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취업 면접 때 회사 대표에게 꼬장꼬장 묻는 말이 통쾌하다. “생리휴가는 있나요? 없어요? 열악하네요.”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에는 ‘영웅’이 산다. 수퍼맨이나 배트맨처럼 변신 복장 갖춰 입고 악당들과 한판 붙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홍색 후드 재킷 입은 조그만 여성이 현실이라면 하지 못했을 행동과 말을 시원하게 내질러준다. 작지만 강하고, 허술한 듯 세다. 일상 속 작은 영웅이랄까. 고구마 먹은 듯 체한 기분이었는데 사이다 마신 듯 상쾌해진다는 댓글 간증이 넘쳐난다.
 
도봉순보다 앞서 인기를 끌고 있는 영웅은 KBS-2TV 수목드라마 ‘김과장’의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고 있는 배우 이영애의 방송 복귀작이자 20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인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를 제압한 괴작이다. 제작비를 많이 들이지도, 이야기가 촘촘하지도 않은데 시청률은 회가 거듭할수록 고공행진하고 있다. 주인공 김 과장(남궁민 분)의 활약 덕이다.
 
드라마는 군산에서 조폭들의 경리를 봐주며 ‘삥땅’을 일삼던 김 과장이 대기업 TQ그룹에 입사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한 몫 제대로 챙겨 세계 최고 청렴 국가라는 덴마크로 이민 갈 궁리만 하던 그가 점점 의인이 되어 간다. 왜? 더 심하게 삥땅치는 회사 고위층과 그들한테 치이는 직장인들을 보면서다. 제3지대에 있는 것처럼 당당한 그는 만능 해결사를 자처한다. 그리고 실제로 ‘천하무적’ 김 과장이 된다. 누구에게나 막말을 일삼던 회장 아들도 그의 앞에 서면 작아진다.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상상해봤을 전복의 장면들이 나오는데 어찌 통쾌하지 않으리.
 
영웅은 난세에 탄생한다고 했던가. 미국의 ‘조상 영웅’인 수퍼맨은 1930년대 대공황 시절 지구에 상륙했다. 수퍼맨의 창작자 역시 대공황의 여파로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대다수 청소년이 길거리로 나가 신문팔이라도 하며 돈을 벌던 시절이었다. 경제는 어려운데 아이러니하게 만화 시장은 이 시기에 꽃을 피웠다. 신문 연재를 벗어나 만화잡지 형태로 나오기 시작한 것. 무한의 힘을 가진 강철 사나이 수퍼맨도 피폐한 현실 속에서 태어나 장성한 셈이다.
 
당시 사람들은 수퍼맨에 열광했다. 지금의 우리가 드라마 속 김 과장과 도봉순 캐릭터에 빠져들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 아닐까. 옴짝달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 말이다.
 
드라마 김 과장에 나오는 직장인들, 참 열심히 일한다. 놀라운 것은 그런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고, 되찾고 싶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할수록 나를 잃어가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상황이 또 어딨을까.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상다반사다. 나를 되찾기 위해, 우리에게는 ‘도봉순’과 ‘김과장’이 당분간 필요할 듯 하다.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사진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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