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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사 '대학살, 살육, 고갈, 황폐'에서 의회연설 '희망, 꿈'으로 전환

중앙일보 2017.03.01 16:12
 “도널드 트럼프가 40일 만에 리셋(reset) 버튼을 눌렀다.”(폴리티코)
전혀 딴 사람이 돼 있었다. 1월 20일 취임사에서 ‘살육(carnage)’ ‘고갈(depletion)등의 격한 표현을 쏟아냈던 트럼프의 모습은 없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의회 합동연설에 나선 트럼프는 연설 내내 ‘더불어(together)’ ‘통합(unity)이란 단어를 반복했다. 여당과 야당, 트럼프와 ‘반 트럼프, 그리고 둘로 갈라진 미국 사회의 화합과 통합을 호소했다. 


“나를 따르라. 따르기 싫으면 그만둬라”는 게 취임 이후 이제까지의 트럼프 스타일이었다면 이날 그가 던진 국정 메시지는 “나 혼자는 갈 수 없다.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이날 연설은 정권의 가치관과 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시정연설이었다. 따라서 트럼프로선 취임 40일 만에 국정운영 노선을 ‘협치로 리셋한 것이나 다름없다.


NBC는 “트럼프가 (취임 이후) 가장 대통령다운 순간이었다”고 평했다. CNN 긴급조사에선 시청자의 78%가 “연설이 좋았다”고 답했다. 트럼프의 지지도가 38%(퀴니피악대, 27일)~44%(CNN, 28일)인 점으로 미뤄볼 때 거의 배로 뛴 셈이다. 이번 연설 흥행은 트럼프의 향후 국정운영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당초 1일 발표 예정이었던 ‘반 이민 행정명령 2탄도 이번 주 후반 이후로 미룰 예정이다.  트럼프의 변신에 여당인 공화당은 물론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도 일제히 기립박수로 호응했다. 오바마케어(오바마 전 대통령이 도입한 전 국민 건강보험 시스템)를 뜯어고치겠다고 한 대목이나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겠다고 한 대목 등에선 야유도 나오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후한 점수를 줬다. 트럼프와 사사건건 충돌했던 공화당의 1인자 폴 라이언 하원의장은 “홈런이다. 환상적인(fantastic) 연설이었다”고 극찬했다. 


트럼프는 이날 자신의 ‘심볼과도 같은 빨간 넥타이를 일부러 하지 않고 상대당 민주당의 색깔인 푸른색 계통으로 했다고 한다. 대통령 뒤에 나란히 앉은 공화당의 마이크 펜스 부통령, 라이언 하원의장까지 파란색 원색 넥타이로 통일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왜 우리가 손을 잡지 못하느냐. 민주당과 공화당은 하나가 돼 미국의 이익, 미국민의 이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나의 행정부는 어린이 의료, 여성의 건강, 공기 정화, 군사력 재건과 인프라 구축을 위해 민주당 의원들과도 정말 함께 일하고 싶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내가 말한 우리의 사명과 비전은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면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의 목적지를 가졌고, 같은 피를 나눴고, 같은 국기에 경례를 한다. 그리고 같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며 미 국민이 하나가 돼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연설의 마무리. “사소한 싸움, 좁은 사고의 시간을 뒤로 돌리고 이제는 우리의 가슴을 채울 꿈들을 공유하고 희망과 꿈을 행동으로 전환할 용기가 필요할 때다.”


 마치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는 듯했다. 트럼프로선 의회를 설득해 함께 하지 못하면 옴짝달싹 못한다는, 40일간 절감한 제도권 정치의 위력을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연설은 미국 내 화합에 초점을 맞춘 때문인지 북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방위비 분담금에 대해선 “나토든 중동이든, 태평양이든 우리의 파트너들이 모두 공정한 몫의 비용을 내길 바란다”는 정도에 그쳤다.

 
이날 트럼프 연설 중 미 언론이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꼽은 부분은 지난 1월 29일 예멘에서 알카에다 격퇴 작전 중 사망한 네이비실 특공대원 윌리엄 라이언 오언스 중사를 소개한 장면이었다. 트럼프는 장녀 이방카 옆에 앉은 미망인 캐린을 가리키며 “라이언의 유산은 영원히 새겨져 있다. 그는 전사이며 영웅이었다. 그의 친구, 그의 국가,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우리는 라이언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캐린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여야 의원, 군 수뇌부, 대법관 할 것 없이 전원이 벌떡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날 연설 중 가장 긴 131초 동안의 기립박수였다. CNN 정치해설가 밴 존스는 “트럼프에게 좌절하고 분노를 느낀 국민도 많았지만 이 순간은 미 정치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트럼프는 (진정한) 미 대통령이 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는 낸시 펠로시(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를 무능하다고 깎아내린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양당의 차이를 뛰어넘어 일하자고 하고, 네이비실(라이언 중사)의 죽음을 ‘장군들의 탓으로 돌린 바로 당일 감성적 헌사를 보냈다”며 “(트럼프의) 동맹도 적들도 뭘 믿어야 할지 머리를 긁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이날 호평을 받은 연설은 장녀 이방카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NYT는 “불법이민자 처리를 민주·공화가 ‘타협(compromise)하자는 아이디어를 연설에 넣자고 트럼프가 제시했지만 결국 사라져버렸다”며 “‘강경파 2인방인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 스티븐 밀러 선임고문의 영향력이 아직 막강함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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