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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7개 화면 … 미술관에 들어온 영화

중앙일보 2017.03.01 01:02 종합 19면 지면보기
영국 출신 미술가 아이작 줄리언의 '플레이타임' 이 설치된 전시장 풍경.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이후남 기자]

영국 출신 미술가 아이작 줄리언의 '플레이타임' 이 설치된 전시장 풍경.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이후남 기자]

어두운 영화관, 아니 전시장에 들어서면 일곱 개의 화면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화면 크기도, 가로 세로 비율도, 흐르는 영상도 조금씩 다르다. 화면마다 같은 인물과 비슷한 장면을 다른 앵글에서 보여주기도, 어쩌면 그 인물들의 시선에 비친 것인듯 전혀 다른 앵글에서 도시의 건축과 풍광 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관람객이 어디에 눈을 둘지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뿐, 이내 7개의 화면이 쏟아내는 이야기에 집중하게 된다. 화면은 달라도 이야기는 하나, 더구나 주인공과 줄거리가 뚜렷한 극영화 형식이기 때문이다.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설치작가 아이작 줄리언(사진) 개인전, 그 중 ‘플레이타임’(2014)이 설치된 공간의 풍경이다.
 

설치작가 아이작 줄리언 개인전
몽타주 기법 같은 다채널 방식 영상
3인의 스토리로 상영시간 67분
금융·미술시장 자본 날카롭게 비판

‘플레이타임’이 설치된 전시장 모습. 7개의 화면 중 사진에는 3개만 찍혔다. [사진 이후남 기자]

‘플레이타임’이 설치된 전시장 모습. 7개의 화면 중 사진에는 3개만 찍혔다. [사진 이후남 기자]

이곳을 찾는다면 여느 전시장과 달리 영화관처럼 눈에 띄는 대로 자리를 잡고 앉는 편이 좋다. ‘플레이타임’은 상영시간이 67분에 달한다. 영화로 치면 중편이다. 이야기는 세계적 금융중심지인 영국 런던의 헤지펀드 매니저, 금융위기를 혹독하게 겪었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부동산 개발업자 겸 작가,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 머나먼 두바이에 가사도우미로 일하러 온 필리핀 여성 등 각기 다른 곳의 세 인물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언뜻 블록버스터가 연상되는 로케이션이다. 할리우드 스타 제임스 프랑코가 런던의 헤지펀드 매니저를 연기하는 것을 비롯, 어쩌면 캐스팅도 그렇다. 중화권 출신의 세계적 스타 장만위나 실제 미술품 경매사 시몬 드 퓌리도 잠시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전하는 공통된 주제는 ‘자본’. 금융자본은 물론 미술시장의 자본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영화다.
 
영국 출신 미술가 아이작 줄리언의 '플레이타임' 이 설치된 전시장 풍경.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이후남 기자]

영국 출신 미술가 아이작 줄리언의 '플레이타임' 이 설치된 전시장 풍경. 서울 논현동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이후남 기자]

영화가 미술관에 성큼 들어왔다. 사실 새로운 소식은 아니다. 미술작가의 영상작업, 미술관과 영화관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은 세계적 흐름이 된 지 오래다. 임흥순 작가의 ‘위로공단’이 가까운 예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은사자장을 수상한 이 작품은 앞서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로 상영됐다. ‘만신’의 박찬경, ‘철의 꿈’의 박경근 등 국내 예술영화 팬들에 낯익은 미술작가는 여럿이다. 영국의 스티브 맥퀸처럼 상업영화 감독이 된 작가도 있다. 일찌감치 영국 권위의 미술상인 터너상을 받은 그는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의 ‘헝거’로 칸영화제에서 주목받고 할리우드에서 ‘노예 12년’을 만들었다.
 
영국 출신인 아이작 줄리언. [사진 Graeme Robertson]

영국 출신인 아이작 줄리언.[사진 Graeme Robertson]

아이작 줄리언은 영국 런던에서 예술학교에 다니며 10대 시절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장편데뷔작으로 90년대초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수상한 이력도 있다. 이런 그의 이번 개인전은 미술과 영화의 뒤섞인 경계, 상업영화관에서 만날 수 없는 영상의 매력, 미술관에서 만나는 영화의 묘미를 모두 체감할 수 있는 현장이다. 특히 7개의 화면에 조금씩 달리 전개되는 ‘플레이타임’의 영상은 현대사회 특유의 ‘분산된 시선’과 화면의 숲에 빠져드는 몰입감을 고루 맛보게 한다.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올리는 데도 여러 개 창을 여는 걸 당연하게 여기죠. 그림을 보러 가서도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모나리자’를 보러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도 휴대폰을 먼저 보죠.” 지금 시대와 관람객에 대해 아이작 줄리언(57)은 이렇게 말했다. 전시개막에 맞춰 한국을 찾은 그는 여러 화면을 병렬로 보여주는 자신의 다채널 방식을 일종의 “몽타주”라고 했다. 구 소련의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이 여러 장면의 편집을 통해 ‘몽타주’ 기법을 구사한 것에 빗댄 표현이다.
 
‘플레이타임’은 프랑스 감독 자크 타티의 1967년작 영화에서 제목을 따왔다. “타티의 작품에 칸막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전경이 등장하는데, 내 작품은 이를 컴퓨터로 대체해요. 오늘날의 이상적인 자본주의는 더 이상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본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수학적 알고리즘과도 같아요.” 그의 ‘플레이타임’은 무형의 ‘자본’을 형상화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전시작 ‘자본론’(2013)은 ‘플레이타임’을 만들기에 앞서 데이비드 하비 같은 석학을 초청해 런던의 미술관에서 진행한 대담의 산물이다.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생전 모습도 등장하는 31분 분량의 영상이다.
 
세계적 작가임에도 아이작 줄리언은 미술시장의 자본을 “끔찍하다”고 표현했다. 그럼 영화시장의 자본은 어떨까. “십년 정도 영화계에서 일해보니 더 사악하다고 느꼈어요(웃음). 미술계는 예술적인 면에서 영화계보다 좀 더 자유롭지요.” 4월 30일까지. 유료관람.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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