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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모두가 나라 걱정하는 애국자이다

중앙일보 2017.03.01 01:00 종합 25면 지면보기
김형오부산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장

김형오부산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장

일찍이 겪어 보지 못한 가장 위험한 국가 위기 상황이다. 첫째, 국론이 심하게 분열돼 있을 뿐만 아니라 수습하거나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 둘째, 나라 안팎의 상황이 어느 때보다 좋지 않다. 셋째, 참고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마저 그 바탕부터 흔들리고 있다. 6·25 전쟁 때도, 4·19, 5·16, 5·18 때도, 몇 차례의 정변과 외환금융 위기 때도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위 세 악조건 중 적어도 한 가지는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르다. 이번엔 다르다는 사실조차 인식도, 인정도 하지 않으려는 지도층의 안이한 태도와 처방 때문에 더욱 암담하고 불안하다.
 

국민의 대분열로 맞은 3·1절
정치권이 타개 국면 걷어차
촛불·태극기 양 진영 진정성
헌재 승복하는 의연함 기대

헌재 최종 변론은 그저께, 특검 수사는 어제 종료되고 오늘은 98번째 맞는 삼일절이다. 기미 정신을 본받는다면 뭔가 종결되고 정리되고 매듭지어져야 하건만 98년 전과는 달리 갈가리 찢긴 상황이다. 가혹한 침탈 정치의 총칼에 맞서 맨몸으로, 태극기와 횃불로 저항했던 선조들 보기 부끄러운 날이다.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을 사이에 두고 두 세력의 증오와 적개심이 하늘 높이 분출된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불과 6개월 전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민족 대분열의 현장이 돼 버렸다.
 
몇 번의 타개 국면이 있었지만 정치권이 걷어차 버렸다. ‘도 아니면 모’라는 식으로 저지르다 보니 일이 꼬였다. “탄핵으로 가면 국론분열과 후유증이 심각해진다. 탄핵은 최후의 수단이다. 우선 명예로운 퇴진(하야)의 길을 열어 두자”고 수차례 얘기했건만 ‘정의’로 풀칠한 승부욕이 발동되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렇게 큰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도 탄핵 전이나 후가 달라지지 않거나 오히려 더 나빠진다면 어이할꼬. 지도자 복이 없는 나라지만 그래도 국민은 살아남아야 한다. 이 위기를 수습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이 역사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동남아나 중남미의 오늘을 보면 결코 빈말이 아니다.
 
필자는 태극기의 진심을 믿는다. 땀을 쏟고 눈물 흘리며 지켜 오고 키워 온 나라다. 그런 이 나라가 좌경화되거나 자유민주주의가 핍박받고 완장 찬 이들이 설쳐대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며 엄동설한에 노구를 이끌고 나온 이들이 다수다. 박근혜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애국심과 우국충정은 인정해 줘야 한다.
 
청와대를 둘러싸고 녹아내리는 촛농보다 더 간절하게 흘린 눈물의 촛불 행렬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고 권력이 사유화되는 데 대한 박탈감과 수치심, 분노를 느끼지 않는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자유민주주의 역사에서 이렇게 평화적이며 이처럼 대규모로 이토록 오랜 기간 촛불을 켜 들고 눈물로 호소한 적이 있던가.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성숙한 민주 시민으로 세계에 당당하다 할 것이다.
 
또 하나,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수십만 명이 한 도시 공간에 대치하면서도 아무런 불상사나 충돌이 없었다는 것은 세계에 자부할 만하다. 세계 시위 문화에 한 획을 긋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직접민주주의를 향한 선진적 모습이라 할 것이다. 이런 자랑스러운 국민들이니만큼 마지막 화룡점정의 기대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 그동안 일부 정치권, 심지어 대선주자들조차 촛불과 태극기 앞에서 선동적 추임새를 보여 왔지만 그래도 국민은 의연했다.
 
헌재의 결정이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찬반 입장은 팽팽해지고 대립은 첨예해질 것이다. 길은 하나다. 한쪽은 이기고 한쪽은 질 수밖에 없다.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몰아갔다. 그릇된 정치가 승부를 열망했고, 분열을 조장했다. 국론은 갈릴 대로 갈리고 정치적 대립은 격화되었다. 한쪽은 승리하고 한쪽은 패배할 것이다. 그것이 지난 수십 년간의 한국 정치였다. 기득권은 철저히 지키면서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화합·화해·통합·포용은 입술에만 있었고 마음에는 없었다. 지역과 계층, 세대와 교육 등으로 나뉘고 갈리기를 수없이 거듭해 왔던 한국 정치사의 마지막 변주곡이 이번 헌재 판결이다. 판결은 재판관의 법과 양심에 입각한 결과일 뿐이다. 수습은 정치의 몫이다.
 
수습은 뒷전인 채 승리의 가마만 타려는 이는 두 달 후 대통령이 될 수는 있겠지만 박근혜보다 더 불행한 대통령, 심하게 말하면 반쪽 대통령 역할도 제대로 못할 수 있다. 증오와 분열의 대가는 꽃가마 대신에 가시방석을 선사할 것이다.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의 찢긴 자존심과 애국심을 어루만지고 싸안을 수 있는 겸손과 포용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이 지도자가 되는 첫 조건이다.
 
화합과 포용, 자기희생과 양보의 길을 찾고 제시해야 한다. 이런 정치를 안 해왔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는 쉬운 일도 어렵게 해왔다. 마음을 비우고 내 편의 국민만큼 내 편 아닌 국민을 인정하면 된다. 대한민국만큼 선량하고 수준 높은 국민도 드물 것이다. 지도자 잘못 만나서 고생할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할 일이 남아 있다. 항상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타이밍을 놓쳐 화근을 키웠다. 마지막 결단을 이번만큼은 더 늦지 않기를 그의 애국심에 마지막으로 호소한다.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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