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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더 늦기 전에 말을 바꿔야 한다

중앙일보 2017.03.01 01:00 종합 27면 지면보기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허태균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라 필자가 유학 시절 경험했던 미국 사회의 가치와 수준은 그보다는 높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미국 사회의 지도층은 겉으로는 그렇게 성적 막말과 인종차별적 발언을 내뱉고, 대놓고 이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 항상 멋진 목소리로 가슴을 울리는 연설을 하던 오바마 전 대통령을 8년 동안 보아왔기에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트럼프의 낙선이 자유,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미국의 헌법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트럼프가 당선됐고, 미국적 가치들에 반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연일 발표해 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각국의 많은 리더가 그 정책과 발언을 비판하고, 수많은 미국인이 다양한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뉴스를 매일 본다.

책임감 있는 대선주자라면
자신을 따르는 국민들에게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라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헌재 결정 이전에
그 말을 해야 더 설득력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과연 미국 사회가 추구해 온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미국을 지탱하는 가치는 그런 트럼프가 절대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격한 논란에도 절차에 따라 질서 있게 선거를 치르고, 그 결과에 승복하고 (꼭 진심은 아닐지 몰라도), 정해진 바대로 진행되는 그 사회 시스템의 힘이 진정한 미국적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다양한 이민자들의 사회이기에 옳고/그른, 맞고/틀린 가치에 대한 합의가 힘들었던 미국 사회로서는 내용이나 결과가 아닌 그 절차와 시스템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미국인은 ‘동의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데도 미국 사회는 대통령 트럼프에 의해 잘(?) 운영되고 있다.

2주 후면 한국 사회의 가치도 무엇인지 확인할 기회가 온다. 그제 최후변론이 있었으니 일반적으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이 2주 안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세간에는 이정미 재판관의 퇴임 이전에 결정하려는 시급함이 그 이후에는 인용 결정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인용이나 기각을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 각자 원하는 바대로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지만, 실제로는 그만큼 결정의 향배는 아슬아슬하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교과서적으로 당연히 헌재의 결정 존중을 얘기한다. 얼마 전 4당 원내대표가 헌재 결정에 승복하겠다고 구두 합의했다. 한편의 코미디다. 바로 그들이 헌재에 탄핵심판을 청구한 주체인데 뭐하러 또다시 승복을 구두 합의하나? 마치 신랑신부가 함께 결혼식 주례를 부탁해 놓고 결혼식 당일 주례 앞에서 그 주례사를 듣기로 다시 구두 합의하는 모양새다. 사실 현재 탄핵심판 에서 주요 주체인 정당은 어차피 결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자기부정이고 스스로 헌정 파괴자가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반 국민과 소위 대선주자들이다. 국회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 현재의 탄핵절차를 책임지고 있지만, 대선주자들은 그 이후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아직도 인용이나 기각, 그 결정의 방향을 외치는 광장에 있다. 어떤 주자는 승복은 하지만 촛불로 반대하겠다는 모호한 표현을 하고, 어떤 주자는 자신은 승복하는데 국민은 어떨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한다. 어떤 주자는 탄핵절차가 잘못됐다는 주장까지도 하고, 여전히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무책임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결정 이후에 말 바꾸기를 쉽게 할 만큼 철면피임을 인정하는 것인가?

옳고 그름을 떠나 지금까지 원하는 결과를 위해 헌재를 압박하는 강한 주장을 한 것까지는 정치행위로 인정한다고 치자. 하지만 이제는 출구전략을 짜야 할 때다. 인간의 행동에 일관성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공개적 발언이다.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면 그 이후의 행동은 바뀌기도 힘들고 더 극단적으로 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결정 직전까지 인용, 기각만이 정의라고 외치던 대선주자가 그와 반대되는 결정이 나온 이후에 갑자기 ‘자, 이제 승복합시다!’ 라고 말하기는 스스로에게도 힘든 일이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국민을 존중하지만 때로는 옳은 방향으로 국민을 이끄는 책임 있는 리더가 될 능력과 자격이 있는 대선주자라면, 자신을 따르는 국민들에게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르라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은 그 결정 이전에 해야지 더 설득력이 있다. 앞으로 2주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헌재 결정을 통해 극복하고 통합하는 준비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국민들은 살펴봐야 한다. 각 대선주자가 이 기회를 어떻게 쓰는지. 2주 후의 미래도 준비 못하는 대선주자에게 4년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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