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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꾼들의 '한탕 기회' 변질된 정리매매

중앙일보 2017.02.26 16:54 경제 4면 지면보기
"오전 11시59분. 197원에서 30만 주 매수. 오후 12시59분. 210원에서 모두 매도. 흐름 읽고 재도전"
 

상장폐지 앞둔 한진해운 거래량 여전
기존 주주 보호 위한 제도인데
허위 정보 흘리며 폭탄 돌리기

퇴출 선고 후 시총 11위 뛴 회사도
"개인 매입 금지, 상한가 등 규제를"

한진해운 정리매매 둘째 날이었던 지난 24일. 주식투자 커뮤니티에선 근거 없는 거래 '인증'과 주가 예측 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이날 거래된 한진해운 주식은 8095만 주. 거래 금액은 171억원에 달했다. 283원에서 출발한 주가는 전날(23일)보다 44.19% 내린 173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주가가 떨어질수록 매수를 부추기는 글은 쏟아졌다. "주말 동안 자산매각 지라시(사설 정보지) 나오면 단번에 4배로 폭등", "기다리면 500원 온다", "회사가 남긴 장비만 팔아도 수천억" 등이다.
 
정리매매는 상장폐지되는 종목을 가진 기존 주주들에게 마지막으로 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현금을 챙겨가란 의미에서다. 거래는 30분마다 한 번씩, 하루 14차례 이뤄진다. 주문자가 원하는 가격과 수량에서 거래할 수 있는 지정가 호가 방식이다.
 
가장 큰 특징은 아래위 30%인 가격제한폭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각한 영업손실로 지난해 1월 상장폐지된 코스닥 업체 승화프리텍이 대표 사례다. 정리매매 둘째 날 주가는 184.7% 치솟았다. 몇일 뒤면 증시에서 퇴출될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42억원에서 1조4969억원으로 불어났다. 코스닥 시가총액 순으로 11위까지 올랐다. 4만원까지 올랐던 주가는 결국 2910원으로 떨어졌고 팔 시기를 놓친 개인 투자자만 쪽박을 찼다.


정리매매 종목의 주가가 롤러코스터를 탄 사례는 숱하다. 가장 큰 이유는 잘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심리 때문에 너도나도 거래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정리매매 패턴을 보면 거품이 생겼다가 꺼지는 것과 같다"며 "내가 주식을 살 땐 거품이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린 것으로, 이른바 폭탄 돌리기와 같다"고 말했다.
 
정리매매 투자자가 곧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빛으로 모여드는 불나방 떼에 비유되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일부러 주식을 대거 사들여 주가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세력도 등장한다. 간혹 회사의 자산매각 계획 등 허위 정보를 퍼뜨려 뇌동매매(남을 따라하는 매매)를 부추긴다. 하지만 결말은 늘 좋지 않다. 한국거래소가 2015년 하반기 이후 상장폐지된 16개 종목의 정리매매 기간 수익률을 분석해보니 평균 -85.4%였다. 
 
상장폐지는 대부분 기업이 안 좋을 때 발생한다. 특히 기업 사업보고서가 쏟아지는 3~4월 빈번하다. 현재 유가증권시장 상장폐지 기준은 14가지다. 그 중 대표적인 사유는 감사의견 거절이나 자본잠식이다. 최근 5년 간(2012~2016년) 증시에서 결산과 관련해 상장폐지된 회사는 84곳으로 이중 감사의견 부적정이 47곳으로 가장 많았다. 자본잠식(30곳), 사업보고서 미제출(3곳)이 그 뒤를 이었다. 한진해운처럼 회생절차가 멈추거나 파산 선고를 받아도 상장폐지 사유가 된다.


일부 개인 투자자는 상장폐지 후 주주에게 돌아올 몫을 기대한다. 그러나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상장폐지는 주로 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자본잠식이 일어난 경우 등 기업이 망가진 경우 발생한다"며 "그럴 경우 정리매매 이후라도 주주에게 나눠줄 몫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고 말했다.


물론 정리매매 기간 오를 만한 이유가 있어 오르는 기업도 있다. 증시에서 퇴출됐다가 기업이 정상화해 재상장되는 경우다. 지금까지 동양강철, 진로, 만도 등이 그랬다. 증권업계에선 "수년이 걸리는 재상장은 신규 상장보다 더 어렵다"고 말할 만큼 사례가 드물지만 정리매매 기간 헐값에 해당 종목을 산 투자자는 대박을 누릴 수 있다. 상장폐지 후에도 경쟁력이 유지될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은 장외거래 목적으로도 거래된다.


정리매매 제도가 취지와 달리 투기 목적으로 악용되는 사례를 막기 위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존 주주가 매도할 수 있게) 하락폭은 제한하지 않는 대신 가격 상한선을 두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며 "한진해운처럼 파산으로 상장폐지되는 종목은 개인 투자자가 주식을 새로 사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새누리 기자 newworl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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