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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취재 후기 2편] 가짜뉴스에 휘둘린 기자들…뛰면서 “왜?왜?”

중앙일보 2017.02.26 15:52
 15일 오후 1시 20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닿은 나는 곧장 공항 제2청사(KLIA2) 3층으로 향했다. 이틀전 김정남이 암살당한 곳이다. 도움을 얻기 위해 일단 인포메이션 센터로 향했다. 김정남도 독극물 피습 직후 이곳으로 와 도움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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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라고 밝히자 직원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며 명단에 이름을 적으란다. 소속ㆍ이름ㆍ연락처를 차례로 적으며 명단을 훑어보니 한국 언론 6곳을 포함해 워싱턴포스트(WP)ㆍ아사히신문 등 21개 매체가 이미 이곳을 다녀갔다. 험난한 취재의 서막이었다.

김한솔 입국소식에 300명 달리기 경쟁
현지 시민들 “한국 ‘런닝맨’ 촬영인가요?”

 
 “상부에서 함구령이 떨어졌다”는 공항 직원들을 통해서는 정보를 얻기 어려웠다. 그나마 카트를 운반하는 용역업체 직원으로부터 “김정남이 죽은 곳은 T구역 키오스크”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주변 상가 직원들은 암살 사건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대답은 하나같이 “13일 오전 이곳에선 아무런 소란이 없었다”는 거였다. 희대의 암살 사건이 벌어졌는데, 현장에선 아무도 몰랐다니. 의문은 이후 현장 CC TV가 공개되면서 풀렸다.(일본 후지TV가 공개한 공항 CCTV를 보니 김정남 공격에 걸린 시간은 단 2.33초였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 도착 직후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질문하는 모습이 현지 매체 영상에 실렸다. KIM(김정남)의 암살 상황을 재구성한 장면인데 공교롭게도 내 성 역시 김씨다. 김준영 기자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제2청사 도착 직후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질문하는 모습이 현지 매체 영상에 실렸다. KIM(김정남)의 암살 상황을 재구성한 장면인데 공교롭게도 내 성 역시 김씨다. 김준영 기자

 
이날 오후 베트남 국적 여성 도안티흐엉이 암살 용의자로 경찰에 잡혔다. 생각보다 용의자 검거가 빨라 놀랐다. 배후는 따로 있고 도안은 꼬리 자르기용인가…? 비슷한 시각,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가 김정남 시신이 안치된 쿠알라룸푸르 병원 부검실을 찾았다. 어렴풋하지만 확실히 뭔가 큰 소용돌이가 감지됐다.
 
#말레이에 나타난 양치기 소년
가짜뉴스가 글로벌하게 판을 치더니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20일 오후 기자들 사이에선 김정남 아들 한솔이 말레이시아에 입국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의 진원지는 메신저 어플리케이션 ‘왓츠앱’이었다. 마카오발 AK8321편을 타고 오후 7시40분에 도착한다는 구체적인 내용의 현지 보도도 이어졌다.
 
내외신 기자 200~300명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과 쿠알라룸푸르 병원으로 가 ‘뻗치기’를 시작했다. 나는 공항으로 갔다. 한 명이 뛰면 수백명 기자가 우르르 뛴다. 다들 뛰면서 선두 기자에 “Why? Why?(왜? 왜?)”라고 외친다. 그러다 그 기자가 뒤를 보며 역시 “Why?”라고 말한다. 다들 허탈한 표정으로 출국장 앞에 복귀.
 
20일 김한솔 입국설이 현장 기자들 사이에 퍼지면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엔 수백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밤을 샌 기자들도 있었지만 입국설은 오보였다. 김준영 기자

20일 김한솔 입국설이 현장 기자들 사이에 퍼지면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엔 수백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밤을 샌 기자들도 있었지만 입국설은 오보였다. 김준영 기자

이렇게 이유 모를 공항 달리기가 4번 이어지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기자들은 욕설을 내뱉기 시작. 친근한 “X발”부터 외신 기자들의 “FXXX”까지…. 말레이 기자들과 일본 기자들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수백명 기자가 우르르 뛰는 장면을 보는 공항 이용객들은 신기한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이거 ‘런닝맨’ 촬영인가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한류가 세긴 세구나….
 
 김한솔 입국설은 경찰청장이 직접 오보라고 확인해주면서 일단락됐지만 23일에도 양치기 소년은 또 나타났다. 오전 9시 30분 북한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연단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대사관으로 향했지만 이 역시 낭설. 바깥으로 나온 대사관 직원을 붙잡고 “기자회견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런 계획 없습니다”란다. 쿠알라룸푸르에 같이 온 신경진 선배는 “말레이에 늑대가 자주 출현하는구만”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신 선배는 김정남이 자신의 가게 단골이라고 주장하는 주인 A씨를 만났다. 내가 말레이에 온 바로 다음날 접촉했던 인물이다. 당시 휴대전화 번호를 가장 먼저 알아내 단독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킨 종북 언론과는 절대 인터뷰 안하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준영 중앙일보 기자

김준영 중앙일보 기자

그런데 며칠 뒤 A씨가 종북 언론으로 규정했던 타사가 단독 인터뷰를 했다며 기사를 냈다. A씨에게 문의하니 “만나지도 않고 쓴 기사다. 소설을 써댔다”며 분개했다. 내가 ‘물을 먹은 것’(언론사에서 기사를 낙종했다는 뜻으로 쓰는 은어)일까. 어느 한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쿠알라룸푸르에서>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3편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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