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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 해방은 강대국과의 이해관계 일치시킨 결과

중앙선데이 2017.02.26 03:37
[세상을 바꾼 전략] 강대국 사이에 낀 국가의 안보
1 쿠웨이트 광복 20주년을 기념하는 쿠웨이트 M-84 전차 퍼레이드. 전차에 게양된 국기는 이라크 국기와 거의 비슷한 문양의 시리아 국기로 시리아 참전을 기념하고 있다.

1 쿠웨이트 광복 20주년을 기념하는 쿠웨이트 M-84 전차 퍼레이드. 전차에 게양된 국기는 이라크 국기와 거의 비슷한 문양의 시리아 국기로 시리아 참전을 기념하고 있다.

 2월 26일은 쿠웨이트의 광복절이다. 쿠웨이트는 지금으로부터 꼭 26년 전인 1991년 2월 이라크의 점령에서 벗어났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광복절은 대체로 독립기념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쿠웨이트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라크 1990년 쿠웨이트 침공하자
35개국이 연합해 이라크 응징

동북아서 군사 강국이 아닌 한국
강대국들과 유대관계 공고히해야


쿠웨이트는 1961년 6월 19일 영국에서 독립했다. 애초 이날이 독립기념일이었지만 독립을 주도했던 쿠웨이트 국왕이 1965년 사망한 후에는 그가 1950년 즉위한 날짜인 2월 25일로 기념일이 바뀌었다. 쿠웨이트는 독립기념일 바로 다음날을 광복절로 정해 매년 이틀에 걸쳐 독립과 광복(해방)을 경축하고 있다
 
쿠웨이트는 인구수와 국토면적에서 대략 세계 150번째 정도의 작은 나라다. 이 소국은 거의 20배가 더 큰 이라크의 점령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라크의 점령 이전에도 쿠웨이트는 대부분의 시기를 큰 제국의 일부로 존재했다. 1752년에 등장한 쿠웨이트는 오스만 제국 이라크 주의 한 자치령으로, 또 1899년부터는 영국의 식민지로 존속했다. 쿠웨이트는 1961년 영국과의 불평등 보호조약을 폐기하고 독립하면서 1962년 아랍연맹과 유엔에 회원국으로 가입했으나, 바로 인접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쿠웨이트, 독립과 해방 함께 경축
쿠웨이트가 이라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시절은 이라크-이란 전쟁 기간이다. 본래 쿠웨이트는 이란과 좋은 관계였으나, 이란이 호메이니 혁명 이후 아랍 왕정 국가들에 혁명을 수출하려고 하자 쿠웨이트는 이란의 경쟁국인 이라크와 협력했던 것이다.
2 2011년 2월 26일 쿠웨이트 광복 20주년 기념 불꽃 축제.

2 2011년 2월 26일 쿠웨이트 광복 20주년 기념 불꽃 축제.

 
이라크-이란 전쟁 후 이라크 경제는 악화됐고,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갈등 관계가 됐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쿠웨이트로부터 100억 달러를 넘게 빌렸는데, 이를 탕감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대신해서 이란과 싸워 주어 쿠웨이트가 혜택을 보았다는 근거에서였다. 또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슬랜트(경사) 채굴 방식으로 이라크 영토의 석유를 도굴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훔쳐간 석유가 24억 달러 정도 되니 배상하라고 쿠웨이트에게 요구했다. 게다가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석유 증산으로 유가가 떨어져서 매년 10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1990년 7월 25일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쿠웨이트가 감산을 약속했다고 발표했지만, 8월 2일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침공’이라는 용어 대신에 ‘해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라크는 본래 쿠웨이트가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는데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분리시킨 지역에 불과하고, 쿠웨이트 왕도 정통성과 국내지지가 결핍된 부당한 권력자이며, 따라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은 곧 쿠웨이트 국민을 부당한 지배자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0년 8월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이라크의 19번 째 주로 공표했다.
 
거의 모든 강대국들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했다. 1990년 8월 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무조건 철수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 외에도 안보리 결의문은 여러 차례 있었는데, 11월 29일에는 이라크군이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군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미국은 모로코·바레인·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아랍에미리트·오만·이집트·카타르 등 아랍 국가 다수를 쿠웨이트 지원군에 포함시킴으로써 이라크를 응징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을 포함한 35개국 거의 100만 명에 이르는 연합군이 구성됐다. 물론 연합군의 4분의 3이 미군이었지만 다국적군으로 부르기에 충분할 정도로 다국적이었다. 헌법이 파병을 금지한 독일과 일본은 대신에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이처럼 쿠웨이트 지원군은 냉전 이래 최대의 국제적 연합군이었다.
 
이에 비해 이라크는 아랍 국가에서조차 지원을 별로 얻지 못했다. 예멘과 요르단 정도만이 이라크를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라크는 반(反)이스라엘 성향의 아랍 국가들 도움을 기대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미국은 이스라엘의 과도한 반격을 자제시켰다. 따라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응징하려고 이라크를 돕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모두가 동의한 군사적 개입은 아시아·아프리카의 최빈국을 대상으로 이뤄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빈국을 제외한 유엔의 군사적 개입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가 거의 유일하다. 만일 오늘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고 한다면, 안보리 상임이사국 전원이 쿠웨이트를 지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재 주요 석유수출국의 하나인 러시아만 해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인해 중동산 유가가 오르면 나빠질 것보다 좋아질 게 더 많아 굳이 이라크를 응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러시아는 아랍 지역에서 미국 및 유럽 국가들과 이해관계가 달라 반대편에 서서 대립하고 있다.
 
이라크군 철수하며 유정 700개에 불 질러
3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로 철군하다 다국적군 공군에 의해 파괴된 이라크 탱크와 트럭들이 일명 ‘죽음의 고속도로’에 방치되어 있는 1991년 3월의 모습. [위키피디아]

3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로 철군하다 다국적군 공군에 의해 파괴된 이라크 탱크와 트럭들이 일명 ‘죽음의 고속도로’에 방치되어 있는 1991년 3월의 모습. [위키피디아]

1991년 2월 27일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이라크군 철군 명령을 내렸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쿠웨이트 해방을 선언했다. 이라크군은 철수하면서 약 700개의 쿠웨이트 유정에 불을 질렀고 또 불을 끄지 못하게 지뢰를 설치했다. 적에게 넘어갈 것은 다 태워버리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의 일환이었다. 쿠웨이트 유전의 불은 1991년 11월에야 전부 진화됐다.
 
작은 나라 쿠웨이트의 해방은 강대국 이해관계와 집단안전보장(집단안보)이 절묘하게 작동한 결과다. 사실 집단안보는 집단방위동맹(동맹)과 여러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 동맹에서는 응징 대상(잠정적 도발국)이 특정되어 있는 반면에, 집단안보의 응징 대상은 사전에 특정되어 있지 않고 실제로 도발한 국가다. 누가 도발국인지 합의할 수 있어야 집단안보가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동맹은 다자 대 다자의 대등한 전쟁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반면에 집단안보는 대다수 대 소수의 일방적인 제재로 추구된다. 국제사회가 도발국을 응징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고 또 도발 세력보다 월등한 힘이 응징 세력에 모여야 집단안보가 작동하는 것이다.
 
셋째, 동맹은 적대국의 패권 추구를 저지하고 자신의 패권을 추구하는 반면에, 집단안보는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체제다. 집단안보가 작동하는 체제에서는 거의 모든 국가들이 도발을 자제하는 것이다.
 
1990년 당시의 집단안보체제가 이라크를 특정해 설정된 것은 아니었다. 누구든 현상을 깨는 국가에 대해 응징하려는 체제였을 뿐이다. 강대국 대부분은 쿠웨이트를 해방시키는 게 자국 이익과 부합되었기 때문에 개입한 것이다. 이라크의 침공을 받은 쿠웨이트는 대의명분과 이해관계 모두에서 지원을 받을 여지가 컸다. 이처럼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국제 여론을 자국의 이해관계와 일치시키는 게 외교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인접한 국가가 자국보다 훨씬 강하고 위협적일 때 어떻게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까? 크게 두 가지 옵션으로 추진될 수 있다. 먼저, 인접 강대국과 친밀해지는 것이다. 극단적인 친밀 관계는 아예 연방의 일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북아시아의 과거사를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 자국을 지배한 외세에게 다시 지배당한다는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접 강대국에 거의 흡수되다시피 하기는 어렵다. 민족뿐 아니라 언어·종교·문화 등의 기준으로 소수가 될 국가는 합류하기가 더욱 어렵다.
 
만일 이런 민족주의적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연방적·연합적 통합은 늘 어렵다. 새롭게 합류할 부유한 국가는 같은 연합 내 빈곤한 다른 국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쿠웨이트 역시 이라크와의 유대에 있어 그런 어려움을 체감했을 것이다. 연방·연합에 추가로 포함될 국가가 빈국일 때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미국은 어떤 빈국이 미국 연방에 포함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도 그런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다고 해서 통합이 쉽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강대국 간 경쟁 땐 ‘고래 싸움에 새우등’ 상황
약소국의 다른 옵션은 더 강한 역외 강대국과 친밀해지는 것이다. 원교근공의 원리에서 보자면, 갈등 발생과 내정 간섭의 여지가 큰 인접 강대국에 비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는 강대국은 사사건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강대국이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동맹국을 얼마나 지원할지는 늘 문제이다. 동맹국을 지원하는 것이 자국 이익에 맞아야 지원한다. 그래서 약소국은 강대국과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고, 주로 유사한 가치관끼리 연대하는 것이다.
 
역외 강대국과 역내 강대국 간의 경쟁이 치열할 때에 약소국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식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반대로 두 강대국이 서로에게 우호적일 때에도 중간의 약소국은 어려울 수 있다. 두 강대국이 약소국을 희생시키고 나눠먹기 식으로 합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의 군사력 지형에서 한국은 강대국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거의 핵무기 보유의 단계에 이른 북한보다도 약한, 최약의 국가일지도 모른다. 정치군사적 대립 구도에서 한국이 합류하는 쪽이 늘 우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즉 군사력 기준에서 한국의 균형자 역할은 어렵고, 따라서 한국은 연대 파트너를 자주 바꿀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안보에 필수적인 강대국들과의 유대 관계는 강대국들과 이해관계를 일치시킴으로써 공고화된다. 그런 동맹과 집단안보의 절묘한 조합만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로체스터대 정치학 박사. 2009년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 2010년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정치 현상의 수리적 분석에 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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