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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쑹칭링을 국가부주석에 임명하고 국모 대접

중앙선데이 2017.02.26 03:18 520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18> 
1 김일성의 선물인 색동치마저고리를 입고 쑹칭링(오른쪽 둘째)에게 안긴 수이융칭.

1 김일성의 선물인 색동치마저고리를 입고 쑹칭링(오른쪽 둘째)에게 안긴 수이융칭.

1927년 7월 14일 쑹칭링(宋慶齡·송경령)은 국민당과 결별했다. 국민당은 쑹칭링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애를 썼다. 쑹칭링은 고집이 셌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네 언니 정말 못됐다”며 짜증을 부릴 정도였다. 항일전쟁 시절, 전시수도 충칭(重慶)에 왔을 때도 쌀쌀맞기는 마찬가지였다.

쑨원 부인 쑹칭링 모셔오기 위해
저우언라이 부인 덩잉차오 파견
마오, 1시간 전에 역에서 기다려
김일성한테 선물 받은 저고리
쑹, 경호원 딸 융칭에게 입혀


 국공전쟁 말기 국민당은 잔국(殘局)을 수습하고 변수(變數)를 만들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명의상 정부 수뇌로 내세우기에 적합한 인물을 물색했다. 쑹칭링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공작을 폈다. 주니카라과 대사에게 비밀전문을 보냈다.
 
 니카라과 주재 외교관이 국제사회에 소문을 퍼뜨렸다. “패색이 짙은 중국국민당이 국부 쑨원의 부인 쑹칭링을 옹립하기로 했다. 수락할 가능성이 크다.” 쑨원의 사망과 장제스의 배신, 장제스에게 살해당한 국민당 좌파 영수 덩옌다(鄧演達·등연달), 홍콩에서 일본인 치과의사에게 암살당한 천유런의 비극을 경험한 쑹메이링은 어설픈 장난질에 동요하지 않았다.
 
 쑹메이링 대신 중국복리기금(中國福利基金)이 성명을 발표했다. “쑨원 선생의 부인이 정부의 직책을 맡기로 했다는 소문은 근거 없는 낭설이다. 부인은 중국복리기금회가 벌리는 구제업무와 아동복리 외에는 관심이 없다.”
 
 베이핑(北平) 입성을 앞둔 중공도 쑹칭링을 탐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연명으로 편지를 보냈다. “중국 혁명의 승리가 임박했다. 상하이의 정세가 어떤지 염려된다. 쑨원 선생의 유지를 실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 북상해서 신중국 건설을 지도해주기 바란다.” 이 편지는 홍콩 지하당의 실수로 전달되지 못했다. 1949년 5월 27일 중공 제3야전군이 상하이를 점령했다. 승리 축하행렬이 거리를 메웠다. 복리기금회 아동들이 선두에 섰다.
 
 중공은 쑹칭링을 베이핑으로 모셔오기 위해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를 파견했다. 쑹칭링을 만난 덩잉차오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친필편지를 전달했다. 쑹칭링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결정은 유보했다. “베이핑은 내게 상처를 안겨준 도시다. 가기가 두렵다. 시간이 필요하다. 결정되면 알려주겠다.” 덩잉차오는 쑹칭링이 결심할 때까지 두 달을 기다렸다. 쑹칭링이 베이핑에 도착하는 날 마오쩌둥은 흥분했다. 중앙위원 50여명과 혁명열사 자녀들이 다니던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1시간 전에 역에 나왔다.
2 저우언라이(왼쪽 셋째)가 수이융칭(저우 오른쪽)을 데리고 산책하고 있다. 원수 네룽쩐(오른쪽 둘째)과 사회과학원 원장 궈뭐뤄(郭沫若·오른쪽)가 뒤따르고 있다. [사진=김명호 제공]

2 저우언라이(왼쪽 셋째)가 수이융칭(저우 오른쪽)을 데리고 산책하고 있다. 원수 네룽쩐(오른쪽 둘째)과 사회과학원 원장 궈뭐뤄(郭沫若·오른쪽)가 뒤따르고 있다. [사진=김명호 제공]

 
 국가부주석에 임명된 쑹칭링은 베이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국모 대접을 받았다. 혼자 살다 보니 민망한 소문도 그치지 않았다. 한 개만 소개한다. “비서와 정분이 났다. 저우언라이에게 재혼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당황한 저우가 마오쩌둥에게 달려갔다. 마오는 과부가 결혼을 작정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잘된 일이라며 싱글벙글했다. 저우는 나라망신이다. 동거는 몰라도 결혼은 안 된다며 사정했다. 쑹칭링은 열 몇 살 어린 비서와 동거에 들어갔다.”
 
 경호원 수이쉐팡(隋學芳·수학방)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쑹칭링은 수이쉐팡을 신임했다. 무슨 일이 건 의논하고 의견에 따랐다. 쑹칭링은 바둑과 춤을 좋아했다. 수이쉐팡은 다재다능 했다. 바둑도 잘 두고 춤 솜씨도 남달랐다. 국모와 몇 시간이고 붙어있는 날이 많았다. 수이쉐팡의 부인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한번은 남편의 집무실에 달려와 소란을 피웠다. 어찌나 요란했던지 이층에 있던 쑹칭링이 내려와 진정시켰다. 경호원의 부인은 막무가내였다. 너 잘 만났다는 듯이 국가 부주석에게 삿대질해대며 씩씩거렸다.
 
 자식이 없던 쑹칭링은 어린애들을 좋아했다. 비서나 경호원들이 자녀를 낳으면 꼭 데려 오라고 당부했다. 수이쉐팡의 딸 융칭(永淸)은 부모를 별로 닮지 않았다. 쑹칭링은 융칭을 유난히 예뻐했다. 품에 안겨 오줌을 눠도 시원하겠다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양녀라 부르며 한방에서 지냈다. 독일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한다. “경호원에게 세 명의 자녀가 있다. 그중 한 명이 지금 내 곁에 있다. 예쁘고 사랑스럽기가 이루 말 할 수 없다. 천둥소리가 나면 무섭다며 내 이불로 파고든다. 번개와 천둥의 원리를 설명해주자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았다. 타고난 무용가다. 세 살인데도 자기의 춤을 출 줄 안다. 사과를 싫어해서 걱정이다.”
 
 김일성이 쑹칭링에게 애들 치마저고리를 선물했다. 융칭에게 꼭 맞았다. 융칭이 추는 조선무용 보며 쑹칭링은 넋을 잃었다. 한복 입고 춤추는 융칭의 사진으로 연하장을 만들어 돌릴 정도였다. 외부에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국가원수가 방문할 때마다 화동(花童)은 무조건 융칭이었다. 쑹칭링은 수이쉐팡의 둘째 딸도 예뻐했다.
 
 수이쉐팡이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도 독일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쉐팡동지가 반신불수가 됐다. 그를 보러 갈 용기가 없다. 애들도 걱정된다. 우월감에 사로잡혀 단체생활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유아원에 보낼 생각이다. 일주일에 한 번만 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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