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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사용 설명서

중앙선데이 2017.02.26 00:02 520호 34면 지면보기
미움
-위키피디아-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관련어 증오: 증오(憎惡)란 특정 음식을 싫어할 때와 다른 사람을 증오하는 데 이르기까지 여러 맥락에 걸쳐 두루 나타날 수 있다. 사람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가 특정 인종 집단에 대한 인종차별주의로 나타나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어떤 나쁜 것 혹은 특정 집단에서 제거되도록 촉구되는 것’, 스피노자는 ‘극도의 요인 때문에 생기는 고통의 일종’으로 증오를 정의했으며 흄은 ‘전혀 정의될 수 없는 강한 감정’이라고 했다
 
-그 여자의 사전-
한 사람에서 시작해 일급 전염병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대상을 확대해가며 여자의 머리와 마음을 지배해 버리는 것.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울컥 울컥 화를 샘솟게 하는 부작용이 있기도 하지만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두뇌회전을 하게 만들고 게으른 생활태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면 내 지인들은 괜히 한 번씩 뜨끔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내 본뜻이 아니다. 사실 미움의 시작이 누구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단 마음속에 미움의 세포가 하나 생겨나면 곧장 생식 세포분열을 일으켜 무럭무럭 급성장을 거듭한다. 그러면 그 사람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다 똑같아!”라며 사람 일반이 미워 보이는 단계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미움은 누구도 장려하지 않는 감정이다. 그러나 미움에 휩싸여 보니 모든 일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함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단 시도 때도 없이 침대와 소파에 축 늘어져 멍 때리기만을 일삼던 생활 태도가 개선됐다. 나른하게 누워있다가도 이불을 벌컥 발로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갔다 움직이기 시작한다. 머릿속은 바삐 움직이며 참으로 오랜만에 뇌세포가 부지런히 활동을 개시하는 걸 실감한다. 인류에 큰 공헌을 한 과학자들의 발견을 가져온 사고의 과정과 외형상으로는 흡사해보인다.
 
셜록 홈즈가 추리할 때 처럼 그날의 현장과 단서를 복기해본다. 그때 나는 왜 어버버하면서 제대로 대꾸를 못했을까. 아니 그에 앞서 왜 그 사람은 나에게 이런 방식으로만 행동해야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분명 내 잘못이라는 단서도 발견된다. 이렇게 나를 돌아볼 수도 있는 것도 미움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순간 지나간다. 하지만 곧 내 머릿속의 지우개를 가져다가 그 부분을 쓱쓱 지워버린다. 지금은 그렇게 한가한 때가 아니야.
 
사건의 복기가 끝나면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이렇게 미움이 쌓이기만 하다보면 그 사람이 기억도 하지 못할 먼 옛날의 감정까지 끌어들여 어느 날 밑도 끝도 없이 분노의 폭탄을 터뜨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럴 때 일수록 냉정하고 차분하게 세련된 복수의 계획을 세워야 해. 어수룩하게 뭉뚱그려진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라 그날의 팩트와 논리만을 가지고 승부를 봐야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저 사람이 철조망의 삐죽한 잔 가시 같은 말들로 내 마음 여기저기를 따끔따끔 찔렀다면, 나는 뭔가 송곳같은 단 한방만으로 그러나 깊숙이 아프게 상처를 내야 한다. 적확한 단어와 냉철한 논리를 최대한 동원해본다. 다시 만나면 이런 이런 키워드들은 반드시 써서 카운터펀치를 날리자. 그 단어들을 외우기 시작한다. 얼굴 표정은 어때야 할까. 살짝 비웃는? 아니 서늘하게 무심한? 아 이제 준비가 된 것 같다. 상황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미움과 분노의 치명적인 약점은 매사에 덤벙거리는 버릇을 최고치로 끌어올린다는 점이다. 모든 준비가 끝났던 날, 전의를 활활 불태우며 반드시 써야할 단어를 스마트폰에 메모하기 위해 충전기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는 순간, 손끝에서 0.1초만에 머리쪽으로 이동하는 전류를 느꼈다. 뇌속에 번개라도 내리치는 듯한 이 짜릿함. 영화라면 이렇게 전기를 맞고 슈퍼 천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220볼트에 1초 미만으로 감전된 나는 그냥 뇌세포 몇 개만 죽이고 말았나보다. 다시 그 사람을 만났고 다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지만 나는 치밀하게 세웠던 내 전략과, 내 키워드와 내 송곳의 기억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또 어버버하고 “저기 그러니까, 그…”만 남발하다 끝나고 말았다. 그 사람을 미워해야 할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이유마저 곧 기억에서 스르륵 날아가버렸다.


억울하지만 할 수 없다. 역시 세상 모든 일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는 것 같다. 감전은 내 아이큐에 약간의 손실을 가져왔지만, 마음속의 미움은 훨씬 더 크게 가져갔으니. ●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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