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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방울마저 잡아내는 스크린 속 연극 무대

중앙선데이 2017.02.26 00:02 520호 30면 지면보기
"It's a girl(딸이에요)." 어디선가 별로 축복스럽지 못한 외침이 들리면 묘하게 찡그린 표정의 중년 여배우가 무대에 똑바로 서서 “응애응애”를 연발한다. 19세기 평범한 한 여성의 탄생 순간을 묘사하는 이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그 자체로 험난한 인생을 예고한다. 일반 공연이라면 객석 제일 앞 3열 정도까지 보였을 법한 여인의 미묘한 표정연기가 관객 전체에게 또렷이 꽂혀든다.
 

NT Live ‘제인 에어’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월 19~25일

NT Live(National Theatre Live)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2009년부터 영국 국립극장이 화제의 연극을 촬영해 전세계 공연장 또는 영화관에서 상영해온 NT Live는 2014년 국립극장이 국내에 도입한 이래 ‘워 호스’ ‘햄릿’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등 세계 연극의 최신 흐름을 국내에 소개해 왔다. 이런 ‘연극의 영상화’가 연극 고유의 예술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NT Live는 지금까지 전세계 2000여 상영관에서 550만 관객을 모으며 순항중이다. 특히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한 ‘프랑켄슈타인’과 ‘햄릿’은 연극이라는 응집된 장르에서 컴버배치만의 메쏘드 연기를 디테일하게 즐기는 독특한 관극 경험을 선사해 국내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연극은 현장감을 즐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런 영상화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바로 ‘땡겨보는 맛’이다. 매순간 무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비추는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배우의 섬세한 표정 변화와 땀방울까지 잡아 주는 것이다. 혹시 같은 작품을 내한공연으로 봤다면 현장감을 즐겼을지언정 자막과 무대를 번갈아 보느라 놓치게 되는 부분까지 영화보듯 자연스럽게 커버되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굳이 땡겨보지 않더라도 이 연극은 관객을 충분히 사로잡을만 하다. 우리가 잘 아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맞다. 19세기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미운오리새끼처럼 차별과 학대를 당해야 했던 평범한 여성이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이야기다. 페미니즘과 신데렐라 스토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이 철 지난 고전적 스토리가 21세기에 펄펄 뛰는 생명력을 얻은 것은 한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는 창의적 연출 때문이다.
 
‘피터팬’ ‘보물섬’ 등 고전 재해석에 정평 난 연출가 샐리 쿡슨 특유의 세련된 감각은 자칫 지루하기 쉬운 장편소설을 경이로울 만큼 속도감 있게 전개시켰다. “딸이에요”로 시작해 “딸이에요”로 끝날 때까지 무대가 한 바퀴 도는 동안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한 여성을 통해 ‘여성’이라는 젠더의 변화와 그 열린 가능성까지 경쾌하게 보여준다. 수미쌍관으로 보이지만 220분의 드라마가 이룩해낸 ‘딸’이라는 말의 어감 변화는 엄청나다.
 
군더더기 일체 없는 하드웨어부터 인상적이다. 아무런 장치 없이 배우와 관객의 상상력 공유만으로 끌고 가는 연극의 본질을 추구하는 동시에 매우 경제적으로 보인다. 연습실 세트를 그대로 옮겨온 듯 목재 구조물과 철제 사다리가 전부인 미니멀한 무대는 19세기 여인들의 황량한 내면까지 대변하고 있다. 텅 빈 무대는 7명의 1인 다역 배우들이 ‘열일하며’ 꽉꽉 채우고, 피아노·드럼·베이스 편성의 재즈 앙상블의 라이브 연주가 암전 따위 개나 줘버리라는 듯 장면 전환을 도맡는다.
 
이 초현실의 무대에서 배우에게 나이란 숫자일 뿐이다. 제인 역의 매들린 워럴은 40줄 아줌마의 현실적 외모를 조금도 감추지 않고 갓난아기부터 10살 소녀, 20대 아가씨까지 종횡무진하지만 전혀 위화감이 없다. 칙칙폭폭 달리는 기차가 됐다가 사각 프레임 하나씩 들고 창문도 만들다 난롯불, 바람, 급기야 제인의 독백까지 되는 다른 배우들도 앙상블을 넘어 각자 뚜렷한 존재감을 어필하며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런 형식과 내용이 맞물리는 지점에 감탄이 터져 나온다. 자선학교 악의 축인 브로클허스트 교장이 손필드 저택에서 사냥개 파일럿이 되어 짖어대는 것도 강력한 웃음코드 이면에 모종의 리얼리티까지 포괄한 고도의 연출이다. 미치광이 여인을 암시하며 제인의 불안을 부채질하는 붉은 드레스 오페라 가수의 출몰은 이분법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는 여성에 대한 원작의 시선을 강렬하게 시각화한다. 가부장제 안에 갇혀 미쳐갈 수 밖에 없던 버사 메이슨은 제인이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영상으로 감상했지만 어떤 라이브 무대보다 연극의 매력을 흠뻑 느껴버린 아이러니가 NT Live의 정당성을 저절로 확보해 주는 듯하다. 기술 발전과 함께 연극 무대에도 온갖 새로운 장치가 동원되는 가운데 ‘제인 에어’는 아무 것 없이도 바로 이런 게 연극이라고 웅변하고 있었다. 디지털 세상에서 외로운 아날로그일 수밖에 없는 연극도 제인 에어처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가야 하는 것 아닐까.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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