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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TALK] 복고를 이끄는 건 마흔살?

중앙선데이 2017.02.26 00:02 520호 29면 지면보기
특별한 사정이 아니고선 이미 줄거리를 다 아는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일이 거의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 요즘 영화 재개봉 열풍은 잘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특히 최근 몇 년 간은 ‘신작보다 더 많은 거 아냐’ 싶을 정도로 재개봉 영화들이 줄줄이 극장에 걸렸다.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재개봉 영화는 2014년 61편이었다가 2015년엔 104편으로 크게 늘었고, 아직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2016년엔 이를 훌쩍 넘어섰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역시 새해부터 재개봉 풍년이다.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 ‘여인의 향기’ ‘델마와 루이스’ ‘빌리 엘리어트’ ‘제리 맥과이어’ ‘원스’ 등이 이미 상영 중이거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계 재개봉 열풍

재개봉 영화가 이렇게 많아지는 이유는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수입·배급사나 극장에게 재개봉 영화는 신작보다 마음 가벼운 선택이다. 필름 영화가 디지털로 리마스터링되면서 과거 영화를 수급하기 쉬워졌고, 당연히 신작보다 수입 가격이 낮다. 이미 입소문으로 검증이 된 작품이기 때문에 홍보 비용도 적게 든다. 그에 비해 성과는 좋다. 지난해 재개봉한 ‘노트북’ ‘500일의 썸머’는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이터널 선샤인’의 경우 2005년 개봉 당시 17만 관객이 봤는데, 2015년 재개봉에선 두 배에 가까운 32만 명이 관람했다. 


하지만 모든 재개봉 영화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계에선 재개봉에 적합한 두 가지 장르로 어린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빌리 엘리어트, 아무도 모른다, 천국의 아이들 등)나 멜로물(러브레터, 이터널 선샤인 등)을 든다. 현재 극장에 걸리는 신작 영화 가운데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장르다. 즉 ‘1000만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적 경험을 원하는 이들에게 재개봉 영화가 먹혀든다는 이야기다. 관객의 대부분은 10~20년 전 이 영화들을 본 30~40대들. 최근 20년만에 ‘제리 맥과이어’를 극장에서 다시 봤다는 친구가 말했다.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니 영화가 죄다 정치물이더라고, 안 그래도 골치 아픈데 톰 크루즈 오빠의 꽃미모나 보며 힐링하자 했지.”


팍팍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과거를 추억하는 정서, 복고 열풍에 대해 최근 출간된 이영미 작가의 책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를 읽다 재밌는 대목을 발견했다. 저자는 1960년대 초반 한국을 휩쓴 ‘현해탄은 알고있다’ 시리즈의 인기를 설명하며 ‘마흔살’을 키워드로 내세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흐름이 대개 창작자ㆍ수용자들의 나이가 마흔 즈음에 이르렀을 때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나이 마흔은 더는 자신이 젊다고 우기기 힘들어지는 시기다. 스무 살 청춘들과의 세대 차이가 분명히 느껴지고,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 등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자신의 삶이나 미래의 삶이 대개 어떠할지 짐작되는 나이다. 바로 이때 사람들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되돌아볼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가장 강렬했던 경험을 했던 스무살 즈음의 경험을 소환하는 것이다.”
 
2010년대 들어 복고 정서가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지금의 40대들이 20대를 보낸 1990년대 초·중반이 문화적 자유주의가 하늘을 찌르던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민정부의 출범이라는 자유로운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제약 없이 폭넓은 문화적 경험을 한 ‘X세대’들인만큼, 좋았던 시절의 문화를 소환하는 욕구가 더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번 주 레고에 빠진 한국의 3040 남성들을 취재하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한 레고 마니아는 말했다. “레고를 좋아하는 성인들의 거의 대부분은 70년대생이에요. 초등학생 때 한국에 막 들어온 레고를 경험한 이들이 나이가 들어 다시 어릴 적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죠.” 문화적 자신감을 지닌 세대인만큼 자신의 취미를 당당히 드러냈고, 이것이 최근 ‘키덜트’ 열풍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X세대’의 범주 안에 드는 한 사람으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지금의 마흔살들이 ‘그 때가 좋았지’에 머물지 말고 과거의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상상력을 선보이는 세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낯선 것과도 계속 소통하며 즐기고 해석하는 마흔살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화려한 과거만 추억하기엔 마흔이라는 나이, 아직 즐기며 살아내야 할 날이 너무 많아 남았으니. 
 
 
글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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