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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술 직접 마시며 주인공 빙의

중앙선데이 2017.02.26 00:02 520호 28면 지면보기
책바에서 추천하는 책과 술 Best 4 (왼쪽부터 1번, 책과 술 설명은 하단에)

책바에서 추천하는 책과 술 Best 4 (왼쪽부터 1번, 책과 술 설명은 하단에)

IT회사에서그래픽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그녀는 9년차 과장이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어서 사내에서도 조용히 일만 하는 사람으로 통한다. 그녀에게 가장 힘든 시간은 회식. 한데 모여 시끌벅적한 공간에서 이야기하고 술 권하는 동료들이 버겁기만 하다.
 

이지민의 “오늘 한 잔 어때요?” <22>
책바를 아시나요

몇 달 고심 끝에 폭탄(?) 선언을 했다. “저 앞으로 회식 자리에는 빼주셨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이 놀랐다. 팀장도 당황했다. 하지만 워낙 일을 잘하는 에이스라 화를 내기도 그렇고, 억지로 회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평화를 찾은 그녀는 이제 업무를 끝내고 조용히 회사를 나서 어딘가로 향한다.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백 대리가 넌지시 물었다. “과장님 퇴근하고 집으로 바로 가세요?” “아니요, 제 아지트로 가요” “혹시 저도 같이 가봐도 돼요?” “…네 같이 가요. 대신 그곳은 각자 조용히 자기 시간을 즐기는 곳이니 감안하고 따라오세요.”
 
그녀를 따라간 곳은 연희동의 어느 골목. 책바(Chaeg Bar)라고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책 읽으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에요. 술을 파는 심야 서점이죠”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공간은 신기했다. 곳곳에 책이 가득한 가운데 바가 있다.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를 뿐, 대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곳곳에 자리 잡은 손님들은 스탠드 불빛 아래 책장을 넘기며 앞에 놓인 술을 홀짝인다.
 
나란히 바에 자리 잡고 책을 고르러 나섰다. 술이 등장하는 책, 여행책, 소설책, 잡지 등이 다양하게 구비돼 있다. 한쪽 코너에는 술이 등장하는 책과 책 속에 소개된 술병이 나란히 진열돼 있다. 성 과장은 조용히 기욤 뮈소의 『사랑을 찾아 돌아오다』를 집어들고는 자리에 앉아 바텐더에게 그로그 칵테일(따뜻한 물에 럼을 넣고 레몬 혹은 라임·꿀·계피·팔각 등을 넣어 마시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칵테일을 한 모금 맛보고는 빠져들 듯 독서를 시작했다. 함께 온 백 대리는 적응이 안 되는지 두리번 거리다 책바 사장님에게 책과 술을 추천받기로 했다.
 
“적응이 안 되시죠? 지속 가능한 딴 짓을 꿈꾸는 ‘호모딴짓엔스’들이 만든 『딴짓』이라는 계간지가 있는데, 이 책 한번 읽어보세요. 일터에서는 보호색으로 감추고 있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딴짓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죠. 스스로의 삶에 다양한 색을 입히려는 사람들의 세계를 담은 책입니다. 이 책에 어울리는 술로는 베네딕틴을 추천드릴게요. 여러 가지 약초로 착향 시킨 가장 오래된 리뷰어 중 하나로, 베네딕틴 수도원에 있는 한 수도사의 딴짓으로 생겨난 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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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묘한 공간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책바’를 운영하고 있는 정인성 사장(31)은 대기업을 다니던 재원이었다. 하지만 직장 3년차가 되었을 때 회사 생활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고, 좋은 회사에서 월급쟁이로 일하는 것이 오히려 안정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에 적합한 인재가 되기보다는 사회에 걸맞는 인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사표를 던졌다. 어려서부터 꿈꾸었던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에 퇴사한지 4개월 만에 연희동에 책바를 오픈했다.
 
15평 남짓한 공간에는 바 좌석 몇 개와 테이블 5개 뿐이다. 테이블 간 간격도 널찍널찍. 혼자 오는 손님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편하게 책술을 즐길 수 있도록 한 배려다. 준비된 책은 모두 정 대표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술에 관한 책 또는 술과 어울리는 책이 대부분이다.
 
궁금해졌다. 책술의 매력은 뭘까. 누구나 책을 보다 특정 술이 등장할 때 그 술을 마시고 싶어지고, 술을 마시며 주인공 또는 해당 인물에 몰입하게 되는 데, 그런 감성적인 감정이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아나스타샤를 그레이가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코스모폴리탄을 마시고 있던 그들을 보고 그레이는 웨이터에게 이렇게 주문한다. “진 토닉으로 하겠습니다. 만약 있으면 헨드릭스나 봄베이 사파이어로. 헨드릭스에는 오이를, 봄베이에는 라임을 같이 넣어줘요.” 매력적인 그가 왜 이 술을 주문했을까? 무슨 맛일까?
 
이 궁금증을 책바에서 해결할 수 있다. 책을 집어들고 자리를 잡은 뒤 헨드릭스진 칵테일을 주문하면 바에서 정인성 사장이 책 속 그대로 만들어준다. 책과 술의 자세한 매칭 스토리는 정 대표가 출간한 『소설 마시는 시간』을 참고할 것.
 
책바는 이런 곳이다. 은은한 조명과 음악, 분위기와 책에 취하는 밤. 퇴근 후 ‘책 한 잔’의 매력에 빠진 백 대리는 그 뒤 퇴근 시간이 오면 조용히 성 과장을 따라 책바로 향했다. ●
 
 
이지민 : ‘대동여주도(酒)’ 콘텐트 제작자이자 F&B 전문 홍보 회사인 PR5번가를 운영하며 우리 전통주를 알리고 있다. 술과 음식, 사람을 좋아하는 음주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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