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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은 마음에 다가가는 작업 … 라흐마니노프 음악도 그랬죠"

중앙선데이 2017.02.26 00:02 520호 16면 지면보기
잘 나가던 음악가가 우울증에 빠져 작품을 못 쓰게 된다. 주변에서 정신의학자를 소개해 주지만 그 사람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어서 티격태격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 결국 마음을 터놓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치유받고 각자의 길로 전진하는 해피엔딩을 향한다.
 

창작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작곡·음악감독 이진욱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흔해 빠진 2인극 스토리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묻어둔 비밀을 꺼내놓는 게 전부다.
 
그런데 웬일인지 눈물이 핑 돈다. 객석 곳곳에서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특별함이라곤 무대 위로 올라온 그랜드 피아노와 현악 6중주단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시종일관 무대 전체를 적신다는 점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의 엄숙한 주제들이 다이나믹한 뮤지컬 넘버들로 변신해 굳어있던 감성에 ‘똑똑’ 노크하는 느낌이랄까.
 
이 무대의 음악을 총지휘한 이진욱(37) 음악감독은 지난 1월 제1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작곡·음악감독 상을 받았다. ‘마타하리’ ‘페스트’ ‘도리안 그레이’ 등 대형 창작 뮤지컬의 홍수 속에 이뤄낸 쾌거였다.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그의 손을 거쳐 어떻게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뮤지컬 음악이 됐을까.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중에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중에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가 주목받는 신예 작곡가로서 야심 차게 발표한 교향곡 1번이 실패하고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재기에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음악은 철저히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을 바탕으로 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중심으로 협주곡 3번, 뒤늦게 재평가받은 교향곡 1번 등을 재료 삼아 고전적 감성을 한껏 자극한다.

여타 뮤지컬보다 음악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보니 음악감독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클래식을 어색해 하는 배우들에게 피아노 레슨까지 도맡아야 했다. “음악을 아는 느낌을 배우들이 갖게 하고 싶었어요. 첫 곡과 마지막 곡 시작 부분을 배우가 시작하게 한 것도 음악가로서 그 감정을 똑같이 느껴보라는 건데, 피아노를 평생 안 쳐본 배우도 있어서 따로 레슨까지 했죠. 서툴러도 그렇게 해야 배우에게서 잔향이 나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악보를 못 보니 동영상 촬영으로 건반만 외워서 치게 했는데, 잘 치는 것 같아 보여도 아직 악보도 못 봐요.(웃음)”


제가 기계적으로 치니까 말씀하시더군요.“러시아에 뭐가 많은지 아니. 종이 많아. 1,2 마디가 다 종소리야.러시아의 어두운 종소리를 들어 봐.”그때 소리를 이미지화해서 만들어 가야한다는 걸 배웠어요.

제가 기계적으로 치니까 말씀하시더군요.“러시아에 뭐가 많은지 아니. 종이 많아. 1,2 마디가 다 종소리야.러시아의 어두운 종소리를 들어 봐.”그때 소리를 이미지화해서 만들어 가야한다는 걸 배웠어요.

배우들에게 피아노 레슨까지
뮤지컬 음악감독이기 이전에 뉴에이지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 라흐마니노프는 특별한 존재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피아노를 독학으로 배워 교회에서 성가대 반주를 하며 실용음악을 해볼까 생각하던 어느 날, TV에서 백건우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연주 실황을 보고 클래식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보통 TV로 클래식 음악회를 오래 보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푹 빠져들었어요. 이 음악을 죽기 전에는 쳐보고 싶었죠. 그 전에는 라흐마니노프가 그저 세광피아노교본 맨 뒷장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음악 교육의 끝판왕이란 막연한 느낌만 있었는데, 클래식의 아우라가 이렇게 환상적이란 걸 처음 경험한 거죠. 아직도 기억날 정도예요.”
 

진공관 스피커 있는 헤이리 카메라타에 
처박혀서 악보만 보며 지냈어요 
블록별로 낱낱이 잘라서 분석하고 
라흐마니노프가 뮤지컬 작곡가라면 
어떨까 상상했죠 

 
군 제대후 음대 입시를 치를 때도 라흐마니노프가 등장한다. 입시곡으로 라흐마니노프를 고른 것이다. “입시를 치르려면 비싼 선생님한테 배워야 하잖아요. 돈이 없어서 주변에서 찾다보니 친한 누나네 언니가 굉장히 부자인데 미국에서 박사까지 하고 와서 우울증에 걸려 라흐마니노프처럼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 누나가 레슨비 대신 빵이나 몇 개 사가라며 소개를 해줬는데, 그 선생님이 입시곡으로 라흐마니노프를 골라 주신 거예요. 제가 기계적으로 치니까 말씀하시더군요. ‘러시아에 뭐가 많은지 아니. 종이 많아. 1, 2마디가 다 종소리야. 러시아의 어두운 종소리를 들어봐.’ 그때 소리를 이미지화해서 만들어 가야한다는 걸 배웠고, 음악에 더 빠져들게 됐죠.”
 
그렇게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 음악 분석을 전공했고, 이번에 그 전공을 살려 라흐마니노프를 낱낱이 분석했다. 매직 아이처럼 복잡한 라흐마니노프의 악보를 거의 외울 정도로 악보를 붙들고 살았고, 라흐마니노프 연주자들의 스타일까지 모조리 외워버렸다.
 
“진공관 스피커가 있는 헤이리 카메라타에 혼자 처박혀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악보만 보면서 지냈어요. 블록별로 낱낱이 잘라서 분석하고, 라흐마니노프가 만일 뮤지컬 작곡가라면 어떨까 상상도 했죠. 뮤지컬은 노래의 멜로디가 중요한데, 피아노 선율엔 사람 음역을 넘는 부분이 있잖아요. 배우에 맞춰 음역대를 조절해 노래를 붙였지만 피아노의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부분은 클라이맥스에 다 차용하려 했어요. 특히 첫 곡 ‘교향곡’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 악보의 키를 바꿔 협주곡 2번과 묶었는데, 단 한소절도 덧붙임 없이 구성만 바꿔서 라흐마니노프의 선율로 만들었죠. 너무 힘들었지만 ‘하면 된다’는 걸 알게 한 작업이었어요.”
 
결국 그에게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란 라흐마니노프에게 협주곡 2번이 주는 것과도 같은 의미가 됐다. 자신이 우울증을 겪던 시기에 만나 도약의 계기가 되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뮤지컬 작업을 그만하고 싶을 때였어요. 재능이 없는건가 고민도 많았죠. 그런데 배우들한테 음악가가 우울증 걸렸을 때의 느낌을 전달하며 드라마를 같이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마치 심리치료극을 하듯 치유를 받게 됐어요. 협주곡 2번을 들으면 태평양 같은 커다란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나요? 당시 라흐마니노프는 월세도 못 내서 오페라 지휘를 하러 갔다가 잘리고, 톨스토이에게 상담받으러 갔다가 면박 당하는 신세였는데, 그런 상황이 협주곡에 보이거든요. 지금의 우리 현실도 젊은 사람들에게 돌파구가 없는 사회잖아요. 관객들도 많이들 우시는데, 그렇게 치유받고들 가시는 것 같아요.”
 
사실 협주곡 2번은 클래식 작곡가들이 “클래식이 아니라 영화음악”이라고 폄훼할 정도로 선율 자체가 대중적 울림이 크다. 그는 이를 러시아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했다. “러시아는 독특한 나라죠. 미국보다 앞선 다인종 다민족 사회라 음악적 전통이 많이 혼재돼 있어요. 동양적인 ‘뽕필’도 있고 유럽적이면서 이슬람적인 전통도 섞여 있으니 그의 선율도 대중적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어요. 당시 이미 현대음악 시대라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처럼 수학적 집합이론으로 음악을 만들던 때고 요즘 작곡가들도 그렇게 접근하고 있는데, 라흐마니노프는 머리가 아니라 감성으로 곡을 쓴 것 같아요. 그래서 뮤지컬과도 잘 통하죠. 작업방식 자체가 솔직하게 사람들 마음에 다가가 어떻게 하면 더 울림을 줄지 고민하는 일이니까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 이범재·박지훈과 현악 6중주 팀의 현란한 라이브 연주가 함께 한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 이범재·박지훈과 현악 6중주 팀의 현란한 라이브 연주가 함께 한다

“창작 뮤지컬은 외국 뮤지컬과 달라야 ”
그는 2015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피아노’에도 얼굴을 비쳤다. 시각장애를 가진 소녀 피아니스트 유예은양의 멘토를 맡아 함께 악상을 주고받으며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라는 근사한 곡을 완성해 희망의 불빛을 밝혀준 것이다.


“그저 생각을 나누고 친구가 되주고 싶었어요. 예은이는 클래식 곡들을 엄청 잘 치기 힘든 상황인데 주변에선 그런 걸 요구하죠. 제가 듣기엔 그런 것보다 자기가 ‘엄마 기쁘게 하려고 써봤다’는 멜로디가 더 좋더라고요. 촬영 때도 아무 계획없이 그저 ‘피아노로 끝말잇기 하자’며 구연동화하듯이 같이 놀다보니 곡이 완성됐죠. 예은이가 좀 더 커서 본인이 가진 걸 충분히 피력할 수 있을 때 진가를 발휘할 거라 믿어요. 그 지점을 어른들이 오롯이 도와줘야겠죠.”
 

제가 기계적으로 치니까 말씀하시더군요.
“러시아에 뭐가 많은지 아니. 종이 많아. 1,2 마디가 다 종소리야.
러시아의 어두운 종소리를 들어 봐.”
그때 소리를 이미지화해서 만들어 가야한다는 걸 배웠어요. 

 
대학 1학년 때 공전의 히트 뮤지컬 ‘김종욱 찾기’ 초연 편곡 작업으로 뮤지컬에 입문했고 몇해 전에는 최초의 창작 뮤지컬 ‘살짜기옵서예’ 리바이벌 편곡을 맡는 등, 나름 창작 뮤지컬의 역사를 함께 써오고 있는 그는 “우리 뮤지컬만의 색깔을 찾고 싶다”고 했다. 다른 나라의 뮤지컬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 뮤지컬 ‘셸브루의 우산’ 작곡가 미셸 르그랑을 좋아해요. 영화 ‘라라랜드’의 모티브가 된 작곡가인데, 60년대부터 클래식과 재즈를 결합해 고유한 느낌을 가진 음악을 만들었죠. 우리도 남들이 안 하는 걸 해야 될 것 같아요. ‘라흐마니노프’ 같은 작업도 그들이 안 하는 지점이라 생각해요. 외국인들이 만드는 걸 좇아가는 사대주의가 아직도 심한데, 그건 그들의 색깔일 뿐 절대적인 게 아니잖아요. 이젠 누가 뭐래도 비슷하게 안 하려구요. 앞으론 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HJ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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