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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7) | 목종(穆宗)과 강조(康兆)] 배신과 지조, 두 얼굴의 사나이

중앙일보 2017.02.26 00:02
거짓 정보에 군사 일으켜 왕 시해… 보스의 신뢰 충분치 않으면 참모의 충성 바뀔 수도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고려 말기의 명재상 이재현. 그는 목종 시해 사건을 논평하면서 강조를 비판하지 않았다.

고려 말기의 명재상 이제현. 그는 목종 시해 사건을 논평하면서 강조를 비판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손에 목숨을 잃는 것, 이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다. 권력의 비정함이랄까, 이 비극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났다. 대의명분 때문이건 사리사욕 때문이건, 정치적인 목적에서건 개인적인 감정에서건, 임금이 신하를 제거하고 신하가 임금을 시역(弑逆)하곤 했다.
 
그런데 임금이야 원래 신하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존재이니 적절한 이유만 뒷받침된다면 신하를 죽이는 것이 규범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신하가 반역을 해 임금을 시해하는 것은 불충을 넘어 패륜으로까지 여겨졌다. 전통사회에서 임금은 부모와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맹자의 가르침처럼 임금이 폭군이고 무도하다면 그 죄를 물어 죽이는 ‘주살(誅殺)’이 허용된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임금을 시역한 신하들은 대부분 반역자로서 역사에 기록된다.
 
이번 회에서 다룰 강조(康兆, 생년미상~1010년)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그는 정변을 일으켜 고려의 제 7대 임금 목종(穆宗)을 폐위하고 살해했다. 목종이 문제가 많았던 임금도 아닌데다가 강조는 왕이 믿고 의지한 신하였다는 점에서 죄질이 나빠 보인다. 하지만 강조를 무조건 악인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미묘한 부분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정변을 꾸짖은 중신들을 깍듯이 예우했으며 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지나친 행동을 보인 일이 없었다. 1010년(현종 1년) ‘거란의 제 2차 침입’ 당시 거란의 40만 대군과 맞서 싸우다 포로로 잡혔을 때도 지조를 지킨다. 항복해 신하가 되면 부귀영화를 약속하겠다는 거란 왕의 회유가 있었지만 “나는 고려인이다. 어찌 너희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라며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목종의 시해에 대한 후대의 평가도 살펴볼 부분이다. 고려 말기의 명재상 이제현(李齊賢)은 이 사건을 논평하면서 목종이 사건의 발단을 제공한 김치양을 처음부터 통제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 뿐 강조를 비판하지 않는다. 강조에 대한 고려인들의 인식이 다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목종의 핵심 측근이었던 강조
 
그렇다면 강조가 목종을 배신하고 정변을 일으키게 된 과정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목종은 나름 괜찮은 임금이었다. 토지제도인 전시과와 과거제도를 개혁했으며,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효과적인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교육을 진흥하고 유교이념을 확산시켰으며, 효행과 절의를 포상해 풍속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는 등 민초의 삶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적어도 평균 이상의 군주였던 것이다. 목종과 동성애 관계였던 측근 유행간이 전횡을 휘둘렀다곤 하지만 과가 공을 덮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목종의 모친인 천추태후(天秋太后, 964~1029)로부터 시작된다. 천추태후는 정부(情夫)인 김치양과 공모해 자신들이 사통해 낳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했다. 목종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량원군(현종)을 후계자로 삼아 보호하는 한편,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로 있던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당시 국경방어를 위해 전방에 주둔하고 있던 강조는 목종의 핵심 측근이었다.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기록이 충분하지 않아 알 수가 없지만, 목종 때 여러 요직을 거쳐 왕명 출납과 임금 호위를 담당하는 고위직인 ‘중추사 우상시(中樞使 右常侍, 종2품)’가 된 점, 또 위급상황이 발생하자 임금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그였다는 점에서 강조는 목종이 깊이 신뢰한 신하였음이 분명하다. 강조 역시 목종의 명령을 받자마자 상경했는데 도중에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진다. 목종은 이미 죽었고 왕위 찬탈을 모의한 태후와 김치양이 그를 제거하고자 어명을 사칭해 불러들인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듣게 된 것이다. 고려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강조가 자신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차제에 없애려 한다는 것이었다. 놀란 강조는 본영으로 돌아가 5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개경으로 진격했다.
 
그런데 그의 부대가 평주(平州, 황해도 평산)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목종이 건재하며 앞선 명령 역시 목종이 내린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어명을 따르지 않은데다 멋대로 군사를 일으킨 셈이 되었으니 이제는 강조가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강조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동안 머뭇거렸는데 이때 큰 잘못을 범한다. 임금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죄를 청한 다음 후속 명령을 기다려야 했지만 그러지 않은 것이다. 목종도 강조가 안심할 수 있도록 다독이거나 하는 등의 조치를 하지 않았다. (다른 내용으로 편지를 주고 받은 것을 볼 때 서로 연락을 하지 못할 여건은 아니었다) 결국 강조는 일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해 계속 진군하기로 결정했고, 목종을 속여 궁궐로 난입해 김치양과 유행간 일파를 처형했다. 그리고 대량원군을 모셔와 보위에 올린 후 폐위돼 유배를 떠나는 목종을 도중에 살해했다.
 
그렇다면 강조는 대체 왜 목종을 배신한 것일까. 목종은 강조를 믿었지만 강조는 목종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공격으로부터, 어명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킨 잘못으로부터, 임금이 자신을 용서해주고 자신을 지켜 주리라는 신뢰가 없었던 것이다. 목종을 죽인 것도, 목종을 살려둘 경우 자신에게 후환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보스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 줘야
 
또한 강조는 정변을 일으킨 후 중대성(中臺省)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고 자신이 그 책임자가 되어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이부상서를 겸직하며 인사권도 장악했다. 이를 볼 때 평소 국정의 중심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목종 대에는 상당 기간 서북면이라는 변방에 나아가 있었으므로 이러한 기회를 갖지 못했던 것이고 그에 따른 불만이 쌓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자신은 좌천 아닌 좌천이 되어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변방에서 고생을 하는데, 중앙에서는 간신들이 판을 치고 주군인 목종은 여기에 휘둘려 무력하게 있으니 답답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때에 원하던 원치 않았던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참에 나라를 평정하고 자신이 역사의 주역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비록 주군을 배반하긴 했지만 ‘부득이’라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했을 것이다.
 
요컨대 목종과 강조의 사례는 보스가 참모를 신뢰하는 것 못지않게 보스가 참모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여기서 ‘신뢰’는 인간적인 믿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데,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뿐 아니라 보스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신뢰 또한 존재해야 한다. 그 신뢰가 충분하지 못하면 충성의 방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보스는 이 점을 늘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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