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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view &] 문화예산 바꿔야 블랙리스트 사라진다

중앙일보 2017.02.23 01:00 경제 9면 지면보기
서경호 경제기획부장

서경호경제기획부장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본지 사설에서도 “헌법이 규정한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헌법정신을 훼손하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해치는 폭거”라고 비판했다.

문화·예술은 전복적 상상력 필요
현 정부 블랙리스트는 ‘못난 짓’
사업자 지원하는 예산이 더 문제
수요자·시장이 선택하게 바꿔야

블랙리스트 하면 과거 독재정권 시절이 떠오른다. 기업과 경찰이 ‘불온세력’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돌렸다. 영화 ‘트럼보’가 잘 보여주듯이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 미국의 할리우드에서도 블랙리스트가 맹위를 떨쳤다. 극작가 트럼보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지키려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10년 이상을 가난과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매카시즘을 비판하면서 “예술가들이 진정성과 자신감을 갖고 창작의 자유를 누려야 건강한 진보가 이뤄진다”고 했다. “예술가가 정권의 도구이자 노예가 될 때, 예술가가 정치적 대의를 선전하는 선봉에 설 때 진보는 발목이 잡히고 그 창의성과 천재성이 파괴된다”는 말도 했다. 다만,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나쁜 짓’이라기보다는 ‘못난 짓’에 더 가깝다고 본다. 취업을 제한하거나 창작의 자유를 금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에 비판적인 예술인을 문예진흥기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리스트였다.

최근 공개된 고영태와 그의 측근 사이의 전화통화 녹취록 중에 눈길 가는 대목이 있었다. 고씨 측근이 말한다. “자기 돈 갖다 하면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 된다 이거야. 정부 돈 갖고 정부나 대통령을 욕하는 게 (말이 되느냐).” 돈으로 자유를 사고파는 듯한 이런 천박한 정신을 구현한 게 블랙리스트였다.

블랙리스트가 ‘못난 짓’인 이유는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정부의 인식 탓이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소위 ‘국뽕 영화’가 여럿 나와서 정권 지지도가 올라갔다는 얘기도, 근면·자조·협동의 투철한 새마을정신을 고양해 우리가 요즘 더 먹고 살기 좋아졌다는 분석도 나는 들은 바 없다.

문화예술은 현실을 뒤집어보는 전복적(顚覆的) 상상력이 중요하다 .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 약간 다른 세상 꿈꾸기, 거꾸로 생각하기, 어느 정도의 불온함…. 이런 게 그리 불편하신가. 하지만 이런 게 예술 창작의 에너지요, 자양분이다. 문화예술계에 유독 진보세력이 더 많아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다.

블랙리스트에 분노하는 여론의 흐름에서 정작 중요한 게 빠져 있다. 문화예산에는 왜 공무원이 인심 쓰는 ‘나눔예산’이 유독 많을까. 문화예산은 올해 6조9000억원 정도다. 이번에 시끄러웠던 문예진흥기금처럼 돈이 나가는 별도의 주머니(기금)가 문화예산에는 꽤 많은 편이다. 예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지출이 법률 등으로 정해져 있는 복지예산에 비해 재량껏 쓸 수 있는 게 더 많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이 문화체육관광부를 은근히 부러워하는 이유다. 보조금 형식의 지원금이 많으니 나눠주는 공무원 어깨에 힘이 잔뜩 실린다. 보수와 진보로 편을 갈라서 지원금을 차별화하겠다는 생각도 이런 예산 관행에서 비롯된 셈이다.

사람이나 단체, 사업자 같은 공급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산 지원방식을 이참에 확 바꿔보자. 문화예술을 직접 향유하는 수요자 중심으로 정책을 바꾸는 것이다. 이미 정부가 시행 중인 저소득층 대상의 문화바우처 사업을 중산층까지 더 확대하는 방안은 없을까. 정부는 바우처만 나눠주고 어떤 문화서비스를 시장에서 선택할지는 소비자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좋은 문화, 훌륭한 예술을 판단해야 하는 부담에서 공무원을 자유롭게 놓아주자. 공무원이 아니라 시장과 수요자가 선택권을 가진다면 블랙리스트 사태는 애초에 불거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시장과 수요자의 선택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특히 순수예술이나 전통문화의 경우 다양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책적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젊은 예술인이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고 수요자가 가까이 찾을 수 있는 전시·문화 공간 같은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고 제대로 된 문화융성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정부가 마땅히 할 일이다. 누가 정권을 잡든 ‘못난 짓’의 유혹은 또 있을 수 있다. 블랙리스트에 분노하는 데 그치지 말고 유인체계부터 손보자.

서경호 경제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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