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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이야기] (24) 비행기 탑승모드로 생활하기

중앙일보 2017.02.18 01:00 종합 16면 지면보기
세상을 바라보는 각자의 색안경 벗어던져야
의사인 친구가 내게 종종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더할 나위 없는 평화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운명이 비행사의 손에 완전히 맡겨짐을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뜻에서 비행기 탑승모드로 생활하는 것은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는 망상에서 자유로워지는 비법일 수 있겠다. 이는 자기 의지에 달린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를 분별하는 것에서 진정한 의지의 힘을 찾는 스토아 철학의 지혜와도 일맥상통한다.

현대의학이 발견한 개념들 가운데 특히 내 가슴에 와닿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항상성 유지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알로스타시스(alostasis·생체 적응 기능)이다.

전자가 외부 환경의 변화와 무관하게 자기 내부에서 쾌적함을 찾는 현상이라면 후자는 그것을 외부 환경 변화에 적응함으로써 구하는 현상이다.

영적 수련은 결국 우리의 행복이 무엇에 달려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행복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이 필요할까. 강장제나 알코올이 있어야만 인생이 장밋빛으로 펼쳐지는가. 우리가 잘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위해서 남들의 동의가 필요할까.

중독과 의존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나의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명상 속에서 자문해 보는 일이다. 신경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우리 정신의 디폴트 모드(default mode)란 바로 그런 명상이 가능한 상태를 말한다.

사실 우리는 과거와 기억, 좌절과 두려움, 기대와 습관으로 얼룩진 색안경을 착용한 채 살아간다. 의식의 온갖 잡동사니로 염색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정신의 디폴트 모드는 그런 불순물의 자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투명한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명상의 전통은 인식과 관념을 선명하게 구분한다. 인식이란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 가령 비를 맞고 바람을 느끼며 별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 관념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덧씌운 모든 것이다. 치장하고 위장하며 그로 인해 고통을 가중시키는 거죽이다.

그 모두를 걷어 내고 발가벗은 의식 자체로 돌아가는 일, 그것은 맑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들여다보면서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얼굴이 왜 그 모양이니? 많이 피곤해 보이는구나! 그새 많이 늙었네 등등 잡다하게 토를 달지 않는 것이다. 그런 판단과 토 달기는 나의 삶에 괴로움만 더할 뿐 나를 바라보는 일과는 무관하다. 관념을 보태지 않고서 나를 바라볼 때 우리는 명세표와 설명서 없이 실재에 다가갈 수 있다.

행복의 비결은 지식을 쌓기보다 덜어 내기에 달려 있다. 주어진 삶의 순간을 알차게 살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각자의 안경을 벗어던질 용기가 필요하다.

비행기 탑승모드로 살아가기란 진정으로 삶의 여행을 즐기는 방법이다. 그 다사다난한 여정에 쓸모없는 실랑이가, 보잘것없는 결과가 잠복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 꼬리표를 떼어낸 자유로운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 기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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