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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조차 세습 안 한다” 비판 뒤 김정은과 갈등 커져

중앙일보 2017.02.15 02:04 종합 4면 지면보기
김정남 독살
“제가 유학을 떠난 뒤로 저의 이복형제들인 정철·정은·여정이 태어나면서 부친의 애정도 그들에게 쏠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완전 자본주의 청년으로 성장해 북한에 돌아간 때부터 부친께서는 저를 경계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부친의 기대 밖이었을 것입니다”(고미 요지 지음,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 중에서)

김정남 생전 심정토로로 본 애증관계
2009년 생명 위협에 일 언론 인터뷰
“유학 떠난 뒤 정은·여정 태어나
부친 애정 쏠려, 날 경계한 것 같아”

2011년 이복동생과 결별 예감한 듯
“내 말 듣고 안 좋은 감정 품으면 … ”

13일 숨진 김정남은 자신이 어버지인 김정일 의 눈에서 멀어지게 된 정황을 이렇게 밝혔다. 일본 언론인과 2011년 3월 주고받은 e메일을 통해서다. “유학 시절 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었고 형제들은 베른에 있었다. 서로 만난 적이 없다”는 그의 말에서 한 아버지를 뒀지만 후계 권력을 두고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평양 권력 내부의 냉혹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이런 메일을 쓴 9개월 뒤 김정일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김정남은 절대권력을 거머쥔 막냇동생 김정은으로부터 경계를 받는 상황이 됐다.
김정남은 김정일 과 여배우 성혜림 사이에서 첫아들로 태어났다. 유부녀이던 성혜림에게 한눈에 반해 강제로 이혼까지 시켜 함께 살면서 얻은 아들이었기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출생 당일인 1971년 5월 10일의 상황을 성혜림의 언니 혜랑씨는 망명 후 쓴 자서전 『등나무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잠결에 ‘빵~ 빠앙~ 하는 수상쩍은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렸다. 4층이던 우리 집 창턱으로 다가가자 어둠 속에 덩치가 큰 시커먼 승용차가 보였다. 김정일 비서였다. ‘이제 방금 혜림이가 아들을 낳았어!’라고 그는 툭 반말을 던졌다. 그의 얼굴에는 기쁨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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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정남은 축복받지 못했다. 김일성으로부터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고, 최고위층 치료시설인 봉화진료소도 뒷문으로 몰래 드나들어야 했다. 게다가 김정일은 김정남이 태어난 지 몇 년이 안 돼 북송 재일동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에게 빠져 성혜림을 버렸다. 성혜림은 모스크바에서 심장병 등으로 우울한 말년을 보내다 2002년 숨졌다. 김정남은 2001년 5월 일본 디즈니랜드를 구경하려 가짜 여권으로 입국하려다 나리타 공항에서 체포됐다. 그의 얼굴이 공개되면서 국제적 망신을 샀고 이를 계기로 김정일 의 눈 밖으로 완전히 밀려났다는 얘기가 나왔다.

2008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복귀한 김정일은 후계를 서둘렀다. 그의 선택은 막내아들 김정은이었다. 국가안전보위부를 장악한 김정은은 2009년 4월 평양의 김정남 거점인 우암각을 습격하는 등 거세작업에 들어갔다. 김정남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정은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다. “중국에선 마오쩌둥조차 세습을 하지 않았다”고 날을 세웠다. 이후 중국과 오스트리아 등에서 암살 시도가 포착됐다. 김정남이 한국 등으로 망명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후견인이던 고모부 장성택이 2013년 12월 김정은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면서 마지막 남은 방어벽이 무너졌다.

김정남은 동생과의 관계 회복도 시도했다. 2011년 1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동생이 후계자로서 북한 주민을 윤택하게 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며 “동생이 제 진심을 이해할 수 있는 도량 큰 인물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정남은 “제 동생이 이 말을 오해하거나 이 말을 듣고 좋지 않은 감정을 품는다면 도량이 작은 사람인 셈이고, 저는 무척 안타까울 것입니다”란 언급도 했다. 그리고 이런 그의 말은 ‘비운의 황태자’ 김정남이 이복동생과의 영원한 결별을 예감한 유언이 됐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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