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90년대 스타크래프트의‘쌈장’… 이젠 ‘석쌤’ 됐죠

중앙일보 2017.02.15 01:00 종합 23면 지면보기
학습지 방문교사로 일하는 ‘1세대 프로게이머’ 출신 이기석씨. [사진 우상조 기자]

학습지 방문교사로 일하는 ‘1세대 프로게이머’ 출신 이기석씨. [사진 우상조 기자]

1990년대 말 1세대 프로게이머 중 최강자로 군림했던 이기석(37)씨. 고교를 갓 졸업한 99년 세계적인 스타크래프트 대회에서 우승하며, 프로게이머의 지존이 됐다.

이기석씨 학습지 교사로 제2인생
그 시절 CF도 출연한 게이머의 지존
“추락은 한순간” 2004년 쓸쓸한 퇴장
“나만의 필살기로 교습 스타일 개발”

자신의 게임 아이디인 ‘쌈장’이란 별명을 얻은 그는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잇따라 석권하며, 광고에도 출연했다. ‘사이버 국방부 장관’에 선정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그는 2004년 은퇴한 뒤 자취를 감췄다. 1세대 ‘지존’ 프로게이머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최근 본지와 만난 그는 “8개월째 학습지 방문교사로 일하고 있다”며 근황을 전했다. 시대를 주름잡던 스타 프로게이머의 놀라운 변신이다. 별칭도 ‘쌈장’에서 ‘석쌤’(석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이씨는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추락은 한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유명해진 뒤 잦은 홍보이벤트, 방송 출연 때문에 훈련에 소홀해졌고, 결국 게임에 지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한다. 프로게이머 최고 수준이었던 연봉(5000만원)은 ‘300만원’으로 곤두박질쳤다. 게임업계를 떠난 이씨는 “일본에선 전문대만 졸업해도 돈을 많이 번다”는 지인 말에 솔깃해 일본 유학을 떠났다.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기 위해 소프트웨어학과를 택했다.
1999년 인터넷통신망 광고에 출연한 모습.

1999년 인터넷통신망 광고에 출연한 모습.

“용돈을 벌려고 도쿄 신주쿠의 한 PC방에서 열린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출전했어요. 16명을 상대로 연승을 거둬 상금 6만 엔(약 62만원)을 챙겼습니다. 내가 프로게이머였다는 사실을 PC방 주인이 나중에 알고 ‘한국 프로게이머 출입금지’란 팻말을 걸었지요.(웃음)”

2013년 귀국한 그는 대형병원·벤처기업의 문을 두드렸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연거푸 퇴짜를 맞았다. 공무원 시험도 2년 연속 낙방했다. 그는 마린·벌처(스타크래프트의 유닛명)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게임 금단 증상도 겪었다고 했다.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게임으로 먹고살기 어렵다는 현실 앞에서 자괴감에 빠졌다”고 말할 때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전직 프로게이머 중 대기업 직원, 게임단 코치로 재기한 사람도 있지만, 공사장 막일을 하거나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운전기사로 일하던 이씨는 지난해 7월 유명 학습지 업체에 입사했다. 유학시절 닦은 일본어 실력이 도움이 됐다. 동료 직원과 학부모 가운데 그가 ‘쌈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게이머는 공부를 못한다’는 편견을 가진 일부 학부모 때문에 과거를 감추고 지냈다”고 말했다.

이씨는 프로게이머 경험이 학습지 교사 업무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지금도 게이머들 사이에 회자되는 ‘메카닉 전술’은 동료 게이머의 전략을 답습해 만든 거랍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공무원 수험계 스타 강사들의 강의를 꼼꼼히 살펴보며, 나만의 교습 스타일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프로게이머 경력이 실패한 경험이라고 생각치 않아요. 뭘 하든 끈기있게 연구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배웠으니까요.”

글=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