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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의 노예 해방, 치열한 승부사 기질로 얻은 선한 결과

중앙선데이 2017.02.12 03:41 518호 22면 지면보기
[세상을 바꾼 전략] 미국 남북전쟁
 올해 실시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바람직한 대통령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인물은 에이브러험 링컨 미국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지금으로부터 꼭 208년 전인 1809년 2월 12일은 링컨이 태어난 날이다. 이날에는 링컨과 더불어 21세기 세상을 상징하는 또 다른 근대 위인도 출생했다. 바로 찰스 로버트 다윈이다.
1862년 7월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선언문 초안을 읽고 있는 각료회의 장면을 묘사한 프랜시스 카펜터의 1864년 유화. 당내 경쟁자를 포용한 탕평 내각(Team of Rivals)으로 왼쪽부터 스탠턴 전쟁장관, 체이스 재무장관, 링컨 대통령, 웰레스 해군장관, 슈어드 국무장관(옆으로 앉은 사람). [중앙포토]

1862년 7월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선언문 초안을 읽고 있는 각료회의 장면을 묘사한 프랜시스 카펜터의 1864년 유화. 당내 경쟁자를 포용한 탕평 내각(Team of Rivals)으로 왼쪽부터 스탠턴 전쟁장관, 체이스 재무장관, 링컨 대통령, 웰레스 해군장관, 슈어드 국무장관(옆으로 앉은 사람). [중앙포토]

해방 선언으로 군사·외교적 승리
흑인 이탈로 남부 연합 전력 약화
남부 도우려는 유럽 참전 명분 없애

선한 지도자 찾는 경향 있지만
좋은 결과 만들 전략적 사고 갖추고
미래의 위기 헤쳐갈 리더 뽑아야


다윈과 링컨은 생일뿐 아니라 여러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생모가 죽었고 자녀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 또한 링컨과 다윈은 턱수염을 기른 50대 초반 무렵부터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떨친 대기만성의 인물이다. 관상가라면 그들의 턱수염과 인생역정을 연결하여 해석할지도 모르겠다.
 
링컨과 다윈은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여 표현할 줄 알았다. 세상을 바꾼 연설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게티즈버그 연설을 비롯해 링컨의 말솜씨는 일품이었다. 다윈의 글 역시 과학적 서술이 아니라 문학적 언술로 봐도 될 정도로 전달력이 뛰어났다. 링컨과 다윈의 말과 글은 상대의 공감을 잘 이끌어냈던 것이다.

링컨, 진화론 관련 전문서적에 유독 관심
다윈을 원숭이로 묘사한 풍자 잡지 ‘라 프티트 린’의 1878년 8월호 표지 [위키피디아]

다윈을 원숭이로 묘사한 풍자 잡지 ‘라 프티트 린’의 1878년 8월호 표지 [위키피디아]

다윈과 링컨의 세계관은 특정 시대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이었다. 진화론과 노예제 폐지론이 그랬다. 인간과 동물의 기원이 서로 다르다는 기존 관념을 부정한 것이 진화론이라면, 노예제 폐지론은 백인과 흑인이 같은 인간일 수 없다는 기존 관념에 저항한 것이다. 다윈과 링컨은 진화의 논리대로라면 노예제가 자연적으로 폐지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음을 인지했다.
 
다윈은 노예제에 대한 혐오감을 여러 곳에서 드러냈다. 예컨대 미국의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에게 보낸 1861년 6월 5일자 편지에서 다윈은 노예제를 “폐지해야 할 지구상 최대의 폐해”로 표현했다. 링컨 대통령 역시 노예제에 반대했고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연합의 노예를 1863년 1월 1일자로 해방한다고 선언했다.
 
링컨은 진화론적 인식을 가졌다. 일리노이에서 링컨과 동업한 변호사 윌리엄 헌든에 따르면 링컨은 전문서적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유독 진화론 관련 서적만은 잘 읽었으며, 한번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철학에서 우연은 없고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다.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고, 현재는 미래의 원인이며, 이것들 모두가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는 끝없는 체인의 연결고리다.” 링컨에게 진화란 이런 체인의 연결에서 나오는 변화였던 것이다.
 
물론 링컨이 읽었다는 진화론 서적은 다윈의 것이 아니고, 링컨의 연설문에서 진화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전쟁 전개를 언급할 때가 유일한데 그것도 보좌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다윈의 노예제 폐지론도 링컨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큰 변화의 방향을 진화적 관점에서 같은 곳으로 보았음은 분명하다. 링컨이 주도한 노예해방 선언, 남북전쟁 승리, 연방 유지 등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사회 진화의 방향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흔히 링컨은 도덕적인 가치만을 중시한 인물로 여겨지는데, 오히려 그는 실행 가능성을 우선에 둔 현실주의적 정치가였다. 링컨은 표를 주고받아 소수 의견을 통과시켰고, 의사 정족수에 미달시켜 다수 의견의 통과를 저지했으며, 의제를 잘 설정해 우세한 후보에게 이겼고, 적절한 선언으로 상대의 동원력을 무력화했다. 링컨이 구사한 전략을 하나씩 예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링컨이 상대 안건을 서로 밀어주는 이른바 ‘로그롤링’을 통해 소수 의견을 통과시킨 예는 1837년 일리노이 주도(州都) 이전 표결이다. 2월 28일 표결에서 링컨의 선거구인 스프링필드는 1차 투표에서 20표를 받았으나 4차 투표에서 70표를 얻어 16표만을 얻은 밴댈리아를 꺾고 새로운 주도로 통과됐다. 교통망 확충과 주립은행 등 표결 중인 여러 안건에서 나눠먹기 식으로 서로를 밀어준 결과였다. 좋게 표현하자면, 링컨이 다양한 이해관계의 집단을 하나로 묶어 다수로 만드는 정치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주도 유치가 통과된 직후인 3월 3일 링컨은 이미 1월 하순에 통과된 노예제 유지 결의안에 이의를 제기했다. 링컨의 이의 제기에는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의원 1인만 동참할 정도로 당시 주 선거구민들은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링컨은 주도 유치라는 선거구민의 뜻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노예제 반대라는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둘째, 링컨이 의사 정족수 미달의 전략을 사용한 예는 1840년 말 휴회 표결이다. 당시 일리노이 주립은행은 교통망 확충 사업 때문에 재정 문제가 발생했고 주 법률이 주립은행의 상환 의무를 주 의회 회기 기간에 한해 유예해주고 있었다. 일리노이주 의회 제1당인 민주당은 공화당 전신인 휘그당이 주도한 주립은행에 지원을 중단하기 위해 휴회를 의결하려고 했다.

의제 설정으로 더글러스 당내 기반 와해
1 남부가 연방에 재가입하지 않으면 남부 경제의 근간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링컨의 경고를 그린 ‘하퍼스 위클리’의 1862년 10월 11일자 만평.

1 남부가 연방에 재가입하지 않으면 남부 경제의 근간인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링컨의 경고를 그린 ‘하퍼스 위클리’의 1862년 10월 11일자 만평.

이에 휘그당은 휴회 의결을 저지시키려고 소속 의원들을 의사당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으며, 따라서 의사 정족수는 채워지지 못했다. 정기회기 이틀 전 원내대표 링컨을 비롯한 3인의 휘그당 의원들은 민주당이 호명 투표를 제대로 진행하는지 감시하고 또 민주당의 좌절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 의사당 좌석에 앉았다. 그러다가 자신들이 의사 정족수에 산입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잠긴 출입문을 대신해 창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이미 정족수에 산입되어 휴회로 의결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민주당이 휘그당을 조롱할 때 자주 사용하는 소재가 되어 링컨에게 모멸감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링컨이 전략을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셋째, 링컨이 의제 설정의 전략을 사용한 예는 일리노이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직을 두고 민주당 소속의 스티븐 더글러스 현역 의원과 벌인 이른바 ‘1858년 대토론’이다. 8월 프리포트에서 열린 2차 토론에서 링컨은 더글러스에게 미국 국민이 주 경계선을 넘어 노예제 폐지를 강요하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한가 물었다. 만일 더글러스가 불가능하다고 대답하면, 노예 자유를 받아들인 일리노이주에서는 링컨 자신이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만약 더글러스가 가능하다고 대답하면, 더 글러스는 노예제에 찬성하는 남부 주들의 심기를 건드려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더글러스는 주 경계선을 넘은 노예제 폐지 결정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덕분에 상원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지만, 186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낙선했다. 링컨은 강력한 대통령 후보인 더글러스가 노예제 폐지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남부 주들에게 공표하게 만들어 남부의 민주당이 다른 후보를 공천하게 했던 것이다. 더글러스가 링컨의 영리한 덫에 빠진 것으로 오늘날 회자되는 사건이다. 정치학자 윌리엄 라이커는 링컨의 프리포트 토론이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대를 꺾은 가장 우아한 전략의 예라고 소개한 바 있다.
 
끝으로,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또한 전략적이었다. 링컨은 일찍이 의원 시절 무조건적인 노예제 폐지가 노예를 실질적으로 해방시키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노예제의 즉각적 폐지에 반대한 바 있다. 1863년 1월 1일자로 천명된 노예해방 선언은 당장 노예를 해방시키지는 않았다. 남부 연합의 노예가 해방 대상이었고 그것도 점령한 북부 사령관에 의해 실행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으로 바로 얻은 효과는 노예 해방이 아닌 군사?외교적 승리였다. 흑인의 이탈로 남부 연합의 전력이 약화됐고, 남부 연합을 지원하려는 유럽 국가들의 참전 명분 역시 사라졌다.

링컨, 도덕에 힘 실으려는 전략적 행동
2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문. J S 스미스 & Co의 1890년 10월 인쇄본. [위키피디아]

2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문. J S 스미스 & Co의 1890년 10월 인쇄본. [위키피디아]

이렇듯 링컨은 재판·표결·선거·전쟁 등에서 냉혹한 승부사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독립하려는 상대를 놓아주지 않고 통합을 강제적으로 유지하려는 링컨의 모습은 반(反)자유주의자로 얼핏 비판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링컨의 행동은 자연과 인간의 선택을 인지하여 결과적으로 도덕에 힘을 실으려는 전략적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종 다윈의 진화론은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사회다윈주의, 사회진화론, 사회적 다윈이즘 등의 개념은 인종주의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나쁜 이론으로 치부되고 있다. 사회다윈주의를 설명하는 기준이 각기 다르고 또 분류된 학자 대부분은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사회적 진화는 사회가 힘의 논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는 것을 사회적 진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은 진화란 옳고 그름을 떠나 적응해 나가는 변화를 의미한다. 제국주의도 한때 진화된 결과였고 민주주의 역시 진화된 결과다. 인간 선택에 의존하는 진화는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링컨의 시대처럼 불황·분열·민주주의·전쟁 등의 위기를 겪고 있다.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새로운 국가 지도자를 올해 안에 선출해야 한다. 우리는 선한 지도자를 찾는 경향이 있다. 지도자가 정치적 이해관계를 따지면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이 전략적 차원에서 나왔다고 해서 폄하되지 않듯이, 우리 지도자의 전략적 태도 역시 존중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국가 지도자의 이해관계가 국민의 것과 일치할 때 국가 지도자는 더욱 국민의 뜻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국가 지도자는 단순히 선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선한 결과를 만들 전략적 사고를 갖춰야 한다. 진화적 관점에서 미래를 내다보면서 위기를 헤쳐나갈 지도자여야 한다. 무능한 지도자로 인해 국민이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작지가 않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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