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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용 캐리어 3개로 이사, 신혼의 텅빈 즐거움

중앙선데이 2017.02.12 00:00 518호 10면 지면보기
1 안방엔 침대와 책상만 두고 공간을 최대화했다. 2 신발장은 없앴다. 부부가 가진 신발은 7켤레가 전부다. 3 원룸에서 공사를 마친 신혼집으로 이사하면서 여행용 캐리어 3개에 짐을 모두 담았다. 4 부엌 식기를 한곳에 모아 사진에 담았다. 전기밥솥을 비우고 냄비로 밥을 짓는다.

1 안방엔 침대와 책상만 두고 공간을 최대화했다. 2 신발장은 없앴다. 부부가 가진 신발은 7켤레가 전부다. 3 원룸에서 공사를 마친 신혼집으로 이사하면서 여행용 캐리어 3개에 짐을 모두 담았다. 4 부엌 식기를 한곳에 모아 사진에 담았다. 전기밥솥을 비우고 냄비로 밥을 짓는다.

신혼집 아파트 거실엔 둥근 식탁 하나와 의자 2개가 전부였다. TV, 쇼파도 없는 거실과 세탁ㆍ건조기가 전부인 베란다를 보면 이사를 하루 앞둔 집이라 해도 의심할 이가 없을 것 같았다. 지난해 봄 결혼한 김한수·서희씨 부부는 지난해 5월 서울시 강서구 85㎡(26평) 아파트에 입주했다. 신혼집 부엌에서 물건 찾기는 숨바꼭질 같았다. 싱크대 위엔 물컵 하나도 없었다. 싱크대 서랍을 열고 나서야 밥그릇과 냄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서씨는 “나무 스푼 2개와 숫가락 4개, 젓가락 4세트. 밥과 국그릇 4개, 냄비 등이 주방 살림의 전부예요”라고 말했다. 서씨는 부부의 미니멀 라이프를 기록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미니멀 라이프는 일상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을 소유하는 삶을 말한다.
 

아파트 거실에 소파,TV도 없어
필요 없는 예복은 취준생에 기부

물건 정리서 시작 ‘디지털 단식’ 진화
스마트폰 사용 줄이는 앱도 등장

잡스?아인슈타인도 미니멀리스트
법정 스님 “갖는다는 건 얽매이는 것”

 ‘캐리어 이사’는 부부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지난해 신혼집 내부 단장을 끝내고 임시 거처인 원룸에서 이사를 나오면서 부부는 여행용 캐리어 3개에 짐을 모두 담았다. 서씨는 “최소한의 물건만 두고 나머지는 기부하거나 중고로 팔았어요”라고 설명했다. 신혼살림도 미니멀 라이프에 맞게 간소화했다. 작은 냉장고와 세탁기, 건조기, 침대, 식탁, 책상이 전부다. 의자 3개는 식탁과 책상을 오가며 번갈아서 사용한다.
 
 서씨가 미니멀 라이프에 입문한 건 2015년 국내에 번역 출판된 책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를 읽고 나서다. 일본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사사키 후미오가 물건을 줄여가는 자신의 삶을 기록한 책으로 국내에선 미니멀 라이프 ‘전도서’로 꼽힌다.
 
 “책을 읽기 전의 삶은 맥시멀 라이프에 가까웠어요.” 서씨의 고백이다. “새로운 물건을 사지 않으면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핑크색을 좋아했는데 립스틱도 색깔별로 사놓고 썼어요.”
 
 지난 1년 동안 물건을 줄이면서 서씨는 몇 가지를 얻었다. 우선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그는 “물건을 정리할 필요가 없어 청소에 쏟는 시간이 확 줄었어요”라고 말했다. 집안을 쓸고 닦는 시간은 하루 10분이면 충분하다. 화장대 가득하던 화장품도 10개로 줄였다. 신용ㆍ체크카드는 17장에서 2장으로 간소화했다. 서씨는 “화장하는 시간이 줄었고 할인카드를 고민하지 않아도 돼 외출 준비 시간도 단축됐다”고 말했다.
 
 삶의 방식도 변했다. 전기밥솥을 없애면서 끼니마다 밥을 지어 먹는다. 반찬은 가짓수를 줄이는 대신 새로운 반찬을 자주 만든다. 서씨는 “설거지는 늘지만 소화가 잘돼요”라고 말했다. 소형 냉장고를 들이면서 대형마트 장보기 횟수가 줄었다. 대신 재래시장이나 동네마트에서 소량 구입한다. “냉장고가 작아 음식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요리를 자주 해야만 해요.”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서씨의 대답이다. 텅빈 공간을 즐기는 여유로움은 덤이다. 볕이 좋은 날이면 베란다에서 이불을 깔고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다.
 
 물건이 줄면서 선택에 대한 고민도 줄었다. 남편 김씨의 신발은 운동화 2켤레, 정장구두ㆍ샌들이 각각 1켤레다. 서씨는 하이힐 1켤레와 운동화 2켤레가 전부다. 서씨는 “물건을 하나씩 줄이면서 집안에 불필요한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적은 물건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미니멀 라이프를 접하면서 물건을 제대로 버리는 방법도 배웠다. 부부는 지난해 겨울 남편의 결혼식 정장을 '열린옷장'에 기부했다. 열린옷장은 정장을 기증받아 취업준비생 등에게 대여해주는 단체다. 김씨는 “물건이 많은 삶이 성공한 인생이라는 가치관에서 벗어나게 된 게 미니멀 라이프가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지난해 70만원 상당의 물건을 각종 단체에 기부했다.
 
 사실 미니멀 라이프는 '수입품'이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물건 소유를 줄이자는 경향이 이웃 일본에서 등장했고 책과 드라마를 통해 국내에서도 유입됐다. 일본에서 유행어로 떠오른 단샤리(斷捨離)는 일상에서 불필요한 것을 끊고 버리는 심플한 삶이나 처세를 뜻한다. 일본 드라마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는 인터넷 블로그 등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 초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다룬 책이 꾸준히 출판되고 있다. 지난해 초 회원 7300명에 불과했던 네이버 카페 ‘미니멀 라이프’는 올해 초 회원수가 6만6000여 명으로 늘었다.
 
 미니멀 라이프가 인기를 끌면서 블로그에선 미니멀리즘 게임도 열풍이다. 미니멀리즘 게임이란 『미니멀리스트』를 쓴 조슈아 필즈 밀번과 라이언 니커디머스가 제안한 ‘물건 비워내기’ 게임이다. 날짜에 맞춰 그 숫자만큼 물건을 버리는 것으로 첫째 날에는 1개, 둘째 날에는 2개를 비워낸다. 이렇게 비워내다 보면 한 달에 465개의 물건을 정리할 수 있다. 네 살 아이를 둔 주부 박모(35)씨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물건이 늘었는데 미니멀리즘 게임을 통해 물건을 줄였더니 집안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에요”라고 말했다. 미니멀 라이프는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는 중이다. 서희씨 신혼집은 올해 초 중국 중앙TV(CC-TV) 뉴스에 소개됐다. CCTV 앵커는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고 정리하는 미니멀 라이프가 한국에서 유행”이라고 소개했다.
 
 집안 인테리어를 간소화하는 것에서 시작된 국내 미니멀 라이프 트렌드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디지털 단식’은 미니멀 라이프의 확장판이다. 쓸데없이 늘어난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고 휴대전화 사용을 줄여 여유 시간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디지털 단식을 돕는 애플리케이션(앱)도 등장했다. 30분에서 48시간까지 스마트폰을 이용할 수 없도록 잠근다. 서울 강서구 원룸에 거주하는 방송 작가 최은영(36ㆍ여)씨도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한다. 18㎡(5.5평) 방은 침대 하나로 꽉 들어차지만 전기밥솥과 토스트기 등을 모두 갖췄다. 최씨는 “나도 모르게 늘어나는 물건을 점검하고 버리는 게 중요하다. 디지털 파일은 필요한 것만 남기고 바로바로 지운다”고 말했다.
 
 미니멀 라이프의 역사는 깊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미니멀리스트다. 그는 “옷 고르는 데 시간을 뺏기기 싫다”며 단벌 패션을 고수하고 있다. 검정 터틀넥 티셔츠에 리바이스 청바지와 운동화를 고집한 스티브 잡스도 단순한 삶을 추구한 미니멀리스트였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회색 슈트를 고집했다. 장석주 시인은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인생관을 담은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에서 “단순함의 미학 추구, 작은 집에서 살기 운동, 소식이 좋다는 인식의 확산, 적게 벌고 적게 쓰자는 각성 등은 사회 전반의 낭비와 소비에 제동을 걸려는 생태주의적 각성”이라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주류 문화에 대한 반동에서 촉발된 일종의 반문화운동으로서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이다. 성공과 소유가 행복을 가져준다는 믿음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허구이고 거품일 뿐이다. 미니멀리스트는 자본주의가 유포하는 허구적 신화를 따르지 않고 가치와 충만함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미니멀리스트는 비본질의 삶에서 벗어나 본질의 삶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인 것이다”고 적었다.


 무소유의 철학을 설파한 법정 스님은 미니멀리스트의 선구자 격이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얽혀 있다는 뜻이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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