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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아라, 도망치지 말고

중앙선데이 2017.02.12 00:00 518호 32면 지면보기
저자: 김훈 출판사: 해냄 가격 : 1만4000원

저자: 김훈 출판사: 해냄 가격 : 1만4000원

공터는 주택과 주택 사이에 있는 빈 땅이다. 아직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미정’의 공간이다. 작가 김훈(69)이 2011년 『흑산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이 장편 소설은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그리고 대통령의 죽음과 1980년대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국사에서 미처 뿌리내리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며 부초 같은 삶을 살아온 마(馬)씨 집안 남자들의 이야기다. 제대로 된 집을 야무지게 짓지 못하고 그저 터 주위를 겉돌며 배회하는. 작가는 “저와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는 역사적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할 만한 건물이 들어서 있지 않은 곳”이라며 “돌이켜보면 그동안 가건물에서 살았던 것 같다. 계속 철거되어 곧 또 헐리겠구나 하는 비애감에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고 설명했다.

『공터에서』


자전적 소설을 쓰겠다는 작가의 말대로, 소설의 주인공 마동수에게는 작가의 부친이자 무협소설 『정협지 』의 작가인 김광주(1910~1973) 선생의 흔적이 어른거린다. “아버지는 나라가 망한 1910년에 태어나셨고, 저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에 태어났다”는 작가는 질곡의 근현대사를 당초 5권 분량의 대하소설로  구상했지만 결국 1권으로 줄였다. 대신 역사의 변곡점을 한 호흡에 보여주기 위해 ‘스냅 사진’과 ‘크로키’ 기법을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특정 사건에 대한 간결하고 빠른, 선명한 묘사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 남산경찰서에 끌려간 마동수의 형이 고문받고 나와 뒷골목 해장국집에서 국밥을 먹는 장면이나 마동수의 부인 이도순이  흥남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 과정, 장남 마장세가  베트남전에 참전해 겪은 참혹한 장면, 차남 마차세가 복무하는 동부전선 풍경에서는 절로 한 편의 영상이 그려진다. 이런 장면은 소설 곳곳에서 되풀이되는데, 단순히 시간 순으로 흘러가는 구성이 아닌 역행하고 또 반복되는 모습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점점 역사의 거대한 수렁에 빠져들게 한다. 이 대목에서 김훈 특유의 절제되고 단단한 문장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기가 아닌 곳에서 살려면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고, 여기가 아닌 곳에서 죽으려면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매와 매 사이에서 솟아올랐다.”(65쪽) “팽팽한 밤하늘에서 별들은 추위에 영글어갔다. 밝은 별 흐린 별이 뒤섞여 와글거렸는데, 귀 기울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15쪽)

첫 문장은 마동수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는 온몸을 편히 누이지 못하고, 모로 누워 꼬부리고 죽는다. 마침 군에서 휴가를 나온 마차세는 하지만 그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홀로 외로이 세상과 하직한 마동수의 일생은 “뭍으로 올려져 아가미를 벌컥거리는 물고기”이자 “머리를 깊이 숙이고, 눈을 가린 갈기 사이로 앞을 내다보며 말없이 터벅터벅 걷는 늙은 조랑말”이다(주인공이 마씨라는 것 역시 상징적이다. 책의 표지에도 말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작가는 “너무 젊게 그려져 재판에서는 다시 그리라고 했다”고 말했다).

고단하게 살아온 마씨 남자들의 삶에도 희망은 있다.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희망이라는 것은 조금밖에 말하지 못했다. 희망을 말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얘기했지만, 실낱같은 그 희망에서 오히려 순환의 질긴 고리가 읽혀진다. 나즈막한 소리로 남편을 다독이는 마차세의 부인과 새로 태어난 딸 누니는 마차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다. “눈발 위로, 세상에 막 태어난 여자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무도 닮지 않고, 스스로가 기원(紀元)인 여자, 그 여자의 얼굴이 점점 커져서 눈 덮인 하얀 세상에 가득 차는 듯 싶었다.”(281쪽)

이 세상은 마동수에게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이것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터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서라도 살아가야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김훈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런 것이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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