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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랍에 숨겨놓은 음악

중앙선데이 2017.02.12 00:00 518호 27면 지면보기
하겐 사중주단과 비올리스트 제라르 코세가 연주한 브람스 현악오중주 음반.

하겐 사중주단과 비올리스트 제라르 코세가 연주한?브람스 현악오중주 음반.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는 다독가였다. ‘책도장’ 애호가이기도 했다. 새 책을 읽을 때는 물론이고 읽은 책을 다시 볼 때도 꼭 도장을 찍었다. 그의 서가 목록에서 발견된 장서인이 70종이 넘는다고 하니, 덕후도 이 정도면 동호회 회장급이다. 그의 장서인은 책이 왕의 소유라는 것을 밝히는 것들이 많은데, 이 중 내 눈길을 끈 것은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인장이다. ‘바쁜 일의 와중에 잠시 짬을 내어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직장인의 책읽기와 음악 듣기와도 꽤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외워놓았다.

WITH 樂 : 브람스 현악오중주

 
정조의 장서인을 보고 나니 문구점에서 고무로 만든 책도장이 갑자기 시시해 보였다. 미련 없이 버리고 새롭게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재미있는 상상을 했다. 만약 책처럼 음반에도 들을 때마다 도장을 찍는다면 어떨까? 자켓이 지저분해지는 것은 그렇다치고 음반 선호의 쏠림 현상이 극명히 드러날 것이다. 음반 애호가들은 동의할 만한 일인데, 좋아하는 곡은 음반 가짓수도 많고 손도 자주 가는 반면 그렇지 않은 곡들은 한두 번 듣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그래서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사들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브람스의 현악오중주 1번과 2번이 그런 처지에 놓이기 좋은 음반이다. 있었는지 없었는지 한참 생각해야만 하는 음반 말이다.
 
브람스에게 베토벤은 성인을 넘어 음악의 신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선배를 따라 인기없는 현악 오중주를 만든다. 물론 베토벤의 있는 줄도 잘 모르는 현악 오중주보다는 브람스 쪽이 조금 낫긴 하다. 하지만 브람스의 실내악 오중주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피아노 오중주나 클라리넷 오중주 아니던가. 브람스의 현악 오중주는 잘나가는 형제들 사이에 낀 서러운 둘째인 셈이다.
 
그의 현악 오중주는 제1, 2 바이올린·비올라·첼로의 편성에 제2 비올라를 하나 더한다. 이런 편성을 ‘비올라 현악 오중주’라고도 한다. 첼로를 편성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슈베르트의 현악 오중주가 그렇다. 이 장르의 선구자는 보케리니나 모차르트지만 최고의 작품은 슈베르트에게서 나온다. 그는 짧은 생을 마감하는 백조의 노래를 위해 저음의 첼로를 택했다. 이런 경우 ‘첼로 현악 오중주’라고 한다.
 
모차르트의 편성을 따라 중역대를 강화한 브람스의 현악 오중주는 각각 30분 분량 정도로 그리 길지 않다. 그런데 이 두 곡을 동시에 수록한 음반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 중 하나가 하겐 사중주단과 비올리스트 제라르 코세가 함께 한 연주다. 평소 자주 꺼내 듣지 않는 음반이어서 이번에 도장 찍듯 새겨들었다. 현악 오중주 1번 op. 88의 도입부는 봄 날 새벽 숲길을 산책하는 듯 밝은 전원풍의 악장이다. 하지만 아침 습기가 묻어 있다. 도입부 제1주제에서 제2 바이올린은 천천히 출발한다. 곧이어 브람스답게 모든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음의 테피스트리가 촘촘하게 엮인다. 이어서 제2주제가 비올라에 의해 제시되고 다른 악기들이 통통거리며 이를 받는다.
 
하겐 사중주단의 연주는 단단하다는 인상이지만 조금은 날카롭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2악장 도입부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주제를 바이올린과 첼로가 조금 더 여유 있게 노래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마지막 3악장은 푸가형식으로 베토벤을 연상시키는 악장이다. 하겐 사중주단의 매력이 드러나는 부분은 이쪽이다. 치밀하게 쌓아 올리는 음악에서 하겐 사중주단의 연주력이 빛을 발한다. 중반부 이후 빠르게 주고받는 바이올린과 제1비올라, 그리고 제2 비올라와 첼로가 벌이는 대위법의 곡예는 아찔할 만큼 매혹적이다.
 
2번 op.111은 시작부터 역동적이다. 첼로가 주도하는 도입부는 실내악이 아닌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악장의 아이디어는 작곡되지 못한 브람스의 5번째 교향곡에서 왔다. 넘실거리는 첼로는 꽉 물린 네 개의 악기 위를 건너다니듯 연주한다. 첼로가 물러나서야 비로소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주제를 반복한다. 이후 느린 주제까지 전체적으로 멜로디 라인이 귀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2악장, 3악장은 애상적이다. 늦은 밤 19세기 빈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 몽환적이며 신비한 느낌이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들어왔다 나아가는 악기들을 쫓아가 보는 재미가 있다. 다만 이번에도 하겐 사중주단은 빠르고 당당하게 걸어서 조금 숨이 차다. 전체적으로 이 녹음에서 하겐 사중주단의 사운드는 울퉁불퉁하지 않은 30대 후반의 근육질 미남자를 연상시킨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젠가 남들에게 인기는 없지만 개인의 서랍장에 하나쯤 숨겨 놓으면 좋을 법한 음악에 대해 말한 적 있다. 그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7번을 예로 들었다. 나는 브람스 현악 오중주를 개인 서랍장에 살짝 넣어 본다. 앞으로 몇 번의 음악 도장을 찍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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