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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가 된 디자이너 … “인간으로부터 휴가였다”

중앙일보 2017.02.11 01:08 종합 12면 지면보기
염소처럼 풀 먹고 네 발로 사흘간 산 영국인 트웨이츠
스위스 알프스 초원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토머스 트웨이츠에게 염소 한 마리가 다가와 친구처럼 대하고 있다. 트웨이츠는 “진짜 염소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염소가 나를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사진 책세상]

스위스 알프스 초원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토머스 트웨이츠에게 염소 한 마리가 다가와 친구처럼 대하고 있다. 트웨이츠는 “진짜 염소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 염소가 나를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사진 책세상]

e메일 인터뷰임에도 바로 핵심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운가”라고 물었다. 생존 경쟁의 현대사회, 푸르른 초원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염소의 처지가 부러워 몸소 ‘염소인간’으로 살았던 영국 디자이너 토머스 트웨이츠(36) 얘기다. 그는 역시 사람이었다. 대답이 솔직했다.

알프스 목장서 특수장치 달고 도전
네 발로 산기슭 내려가는 고통 극심
풀 소화 안 돼 압력솥에 끓여 먹어

자유 만끽하려고 황당무계한 실험
염소가 다가와 코 비빌 때 가장 행복
농장주 "염소 일원 됐다” 방울 달아줘

경험담 출간, 세계서 강연 요청 몰려
"눈앞의 순간에 충실하라” 깨달음 얻어
만물을 관계로 보는 동양철학에 눈떠

“하하하, 그럴 수만 있다면…. 그래도 두 가지를 배웠다. 첫째, 인간에게는 탈출구(escape)가 없다. 도전하고, 적응하며, 최선을 다할 뿐이다. 둘째, 초원은 늘 푸르다는 점이다. 염소가 되겠다고 달려들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날은 추웠고, 풀을 먹는 것도 불편했다.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포근한 침대와 따듯한 커피, 말끔한 옷 등등.”
토머스 트웨이츠

토머스 트웨이츠

트웨이츠는 괴짜다. 2014년 가을, 그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 있는 염소목장을 찾았다. 나름 인터랙션 디자이너(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탐구)로 이름을 알렸으나 시동 꺼진 자동차처럼 앞날이 캄캄하기만 했던 때였다.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걱정에서 도망칠 길은 없는 걸까.” 그는 염소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특수장치를 달고 염소처럼 네 발로 알프스 산기슭을 사흘간 기어 다녔다. 염소 무리와 함께 풀도 뜯었다. 발상이 엉뚱하다. 도전은 황당무계했으나 짧게나마 해방감을 느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으로부터 휴가”다. 최근 번역된 『염소가 된 인간』(책세상)은 그만의 기이한, 어쩌면 반쯤 미친 듯한 생존기다. 그렇다고 오해 마시라. 인간의 몸과 마음,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탐색이 진지하다.
 
무엇이 그토록 절박했나.
“절박하다기보다 의기소침하던 때였다. 돈이 떨어지고, 직업도 없었다. 동물처럼 빠르게 달리며 자유를 만끽하면 멋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코끼리를 떠올렸지만 이내 계획을 접었다. 덩치가 너무 컸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들어야 했다. 코끼리는 사람처럼 슬픔·우울증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염소 프로젝트로 지난해 이그노벨상 생물학상도 받았는데. (※이그노벨상은 미국 과학잡지 ‘에어(Air)’가 물리학·의학 등 여러 분야에서 기발한 연구 성과를 이룬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책까지 냈지만 유명해지려고, 부자가 되려고 한 게 아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한번쯤 동물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가. 나도 고양이를 꿈꿨던 적이 있다. 삶의 밑바닥에서 그 생각이 다시 났다. 조카가 맡긴 개를 일주일간 돌본 적이 있는데, 멍멍거리며 뛰어다니는 개를 보며 두 발 달린 내 몸에 네발짐승의 것을 씌워보자고 결심했다.”
염소가 되려면 야생 풀을 먹어야 했다. 트웨이츠는 씹고 뱉은 풀을 끓여서 몸에 필요한 당분을 섭취했다.

염소가 되려면 야생 풀을 먹어야 했다. 트웨이츠는 씹고 뱉은 풀을 끓여서 몸에 필요한 당분을 섭취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이라면.
“네 발로 알프스 산록을 내려가는 일이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고통이 극심했다. 가장 끔찍한, 가장 위험한 경험이었다. 염소 떼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가파른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뼈가 부러질까 두려웠다. 요가로 유연성을 기르고 실내 암벽등반을 하며 근력도 키웠으나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탈리아 국경 알프스 산정(山頂)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과 골격이 비슷하지만 나머지 작은 차이가 엄청난 고통을 불렀다.”
반대로 행복했던 때도 있었겠다.
“염소 중 한 마리가 내게 다가와 처음으로 코를 비비던 순간이다. 나를 피하지 않았다. 함께 풀밭을 돌아다녔다. 내가 자리를 옮기면 이 염소도 따라왔다. 농장을 떠날 무렵 그 주인이 ‘마침내 당신이 염소의 일원이 됐다’고 했다. 그러고 내 목에 염소방울을 달아주었다. 성취감이 대단했다. 드디어 내가 염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됐구나!”
준비 과정이 매우 치밀했는데.
“각계 전문가 도움을 받았다. 과학의 힘을 빌려야 했다. 덴마크 주술사부터 영국 최고의 염소연구자, 동물행동학자, 신경과학자, 의수족 제작자까지 만났다. 반추위가 없는 인간은 풀의 섬유질을 소화할 수 없기에 압력솥까지 준비했다. 내가 씹은 풀을 압력솥에 넣어 다시 식초를 넣고 끓였다. 그렇게 당(糖)을 얻을 수 있었다.”
트웨이츠는 네 발로 걷는 장치를 만들기 위해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왼쪽부터 나무로 사지를 만든 1차 모델, 골격의 탄력성을 강화한 2차 모델, 의수족 전문가 존 허친슨 박사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최종 모델.

트웨이츠는 네 발로 걷는 장치를 만들기 위해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다. 왼쪽부터 나무로 사지를 만든 1차 모델, 골격의 탄력성을 강화한 2차 모델, 의수족 전문가 존 허친슨 박사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최종 모델.

트웨이츠는 ‘토스터 프로젝트’로 처음 주목을 받았다. 영국 왕립예술대학 석사 과정 졸업 작품이다. 이때 역시 무모한 실험을 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주방기기 토스터를 손수 만들었다. 토스터 제작에 필요한 철광석 덩어리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해 모든 재료와 부품을 직접 조달했다. 무려 9개월간 200만원을 들인 그만의 ‘역작’은 빵 대신 제 몸을 굽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시대 분업체계와 환경문제, 소비문화를 돌아보게 했다. 당시 좌충우돌 모험담도 5년 전 국내 번역됐다.
 
천성이 호기심 천국인 모양이다.
“런던대 학부에서 경제학과 생물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과학과 공학을 좋아한다. 또 이야기와 큰 생각(big idea)을 선호한다. 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과학의 방향을 질문하고 싶었다. 좀더 빠르고, 쉽고, 화려한 것만이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좀 더 느리고, 지저분하고, 또 엉뚱한 데서 시작하기도 한다. 과학이 현대사회의 기초인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적인 것에 대한 끝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두 프로젝트의 차이, 혹은 공통점은.
“우리가 딛고 있는 세상을 다른 시점에서 보려고 했다. 고정관념의 파괴다. 토스터는 멋진, 빼어난 물건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인류문명의 모든 역사가 들어 있다. 염소 또한 귀한 동물이 아니지만 그들과 함께하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두 프로젝트 모두 단순하면서도 불가능한 목표를 내세웠다. 터무니없어 보이나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다.”
다시 염소로 돌아가고 싶나.
“그동안 의수·의족 등 보철장치를 꾸준히 개선해왔다. 처음보다 고통이 많이 줄어들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다. 요즘 전 세계 염소농장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온다. 가장 큰 교훈이라면 염소는 눈앞의 순간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사람처럼 과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도 지성적 자아 외에 동물적 자아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알맹이는 자연과의 조화다.”
염소 말고 다른 동물을 또 택한다면.
“벌레로 변신한다면 어떨까.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지금과 전혀 다른, 그러면서도 같은 세계?”
인간과 동물의 공생, 동양인에게 익숙하다.
“최근 동양철학에 관심이 생겼다. 인간은 이성적 개체라는 그간의 믿음에 변화가 왔다. 사람은 다른 생명, 나아가 자연과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스마트폰도 홀로 있는 게 아니라 커다란 네트워크 안에서 존재한다. 우주 만물을 연결체로 보는 샤먼(무당)에 눈을 떴다. 비교신화학도 공부할 작정이다. 오는 5월께 첫 아이가 생기는데, 그 아이를 보는 느낌이 각별할 것 같다.”
세 번째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면.
“아직 결정된 건 없다. 다만 독자들이 이 점만은 기억했으면 한다. 서른이 될 때까지 어떤 한 가지에 매달리지 않았으면 한다. 월급도 중요하지만 즐거운 일을 추구해야 한다. 비록 황당하더라도 말이다. 그게 내 아버지가 가르쳐준 점이다.”
 
[S BOX] “한국사 흥미” 지난해 광주서 VR 다큐 만들어
“광주 지역의 나이 든 예술가들과 술과 음식을 나누며 즐겁게 지냈어요. 매력적이었죠. 한국사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고, 최근의 급격한 사회 변화도 알게 됐습니다.”

트웨이츠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2015년 6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사물학2:제작자들의 도시’ 전시에 토스터 프로젝트를 출품했다. 지난해 겨울 석 달간 광주광역시 레지던시(작가 입주)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한국에 머물며 작업한 가상현실(VR) 단편영화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에서 선보였다. 해당 작품은 그의 개인 누리집(thomasthwaites.com)에 올라와 있다.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본 다큐멘터리입니다. 제목은 ‘리빙 히스토리(Living History)’로 붙였습니다. 지금부터 2세기 후의 사람들이 지금 우리들이 빚어낸 이미지들을 보면 무엇을 생각할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했어요. 삼성이 만든 기어 가상현실 헤드셋을 끼거나, 아니면 2차원 평면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트웨이츠는 한국에서 문화적 차이도 느꼈다. “구멍가게에서도 파는 스팸 선물세트가 새로웠다. 영국에선 전통적으로 스팸을 선물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최근의 한국 정세도 뉴스를 통해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도둑정치(Kleptocracy)에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가 잇따랐다고 들었어요. 투명하고 책임감 있는 거버넌스(governance·통치)에 대한 갈망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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