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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일의 시시각각] 나라 두 동강 낼 엘리트 카르텔

중앙일보 2017.02.11 01:00 종합 26면 지면보기
홍승일 논설위원

홍승일
논설위원

신문·방송 뉴스에서 시내버스에 관한 생활기사가 확 줄어든 건 1990년대 들어서다. 마이카 시대를 맞아 자가용족 기자가 늘면서 버스가 언론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 버렸다. 대중교통 하면 낙선한 힐러리 클린턴의 지난해 4월 ‘지하철 굴욕’ 사건이 떠오른다. 밑바닥 표심 훑겠다고 뉴욕 지하철을 찾았다가 개찰구에 교통카드 하나 제대로 긁지 못해 승객들의 빈축을 샀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연초 귀국하자마자 허겁지겁 민생행보에 뛰어들었다가 엉성한 장면을 자주 연출하면서 손해를 봤다.

‘그들만의 리그’로 좋은 것 독차지
좌우 이념대립보다 분열 폐해 심각


대중교통과 튼튼한 두 다리를 벗 삼는 ‘BMW족(Bus·Metro·Walk)’ 민초들의 숨결을 바짝 다가서 느껴보는 건 정치지도자의 본분이다. 다만 5년 주기 대선 철마다 후보들이 시장터와 양로원·달동네 등지를 누비며 서민 코스프레에 열 올리는 모습은 따듯한 정경(情景)과는 거리가 있다. 선거 후에도 과연 그럴까.

보통사람임을 입버릇처럼 되뇌지만 결국 보통사람들의 마음조차 사지 못하는 건 정치엘리트뿐만이 아니다. 법조·재벌·학자·관료 등 각 분야 엘리트들은 ‘강남 좌파’가 빠지기 쉬운 허위의식의 함정처럼 몸과 마음 따로 노는 유체이탈 화법을 일삼다 신뢰를 잃곤 한다. 사실 촛불을 켜게 만든 건 최순실 사태지만 촛불의 표적은 확대일로다. 어불성설인 일이 대한민국 땅에서 벌어지게 만든 조력자들, 또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부정부패의 고리, 거대한 엘리트 카르텔 시스템”(미국 마이클 존스턴 교수)에 대한 개혁 열망이 그것이다. ‘이게 나라냐’는 광장의 함성, “XX하네”라는 어느 청소원 아주머니의 외마디는 똘똘 뭉쳐 온돌의 따뜻한 아랫목을 내놓지 않으려는 파워 엘리트 집단이기심에 대한 증오다. 관피아·금피아·검피아·군피아·교피아 같은 말 속에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삐뚤어진 엘리트 카르텔의 음습한 냄새가 풀풀 난다.

‘그들만의 리그’에 익숙한 탓에 파워엘리트의 대외적인 소통 능력과 민심 해독력은 해외에서도 현저히 약화된 듯하다. 미국과 유럽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영국의 브렉시트 가결을 두 나라 여론주도층은 미리 감지하지 못했다. 비범한 협상가이자 승부사인 트럼프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바로 ‘먹물’들의 이런 약점이다. 지난달 대통령 취임 직후 일련의 ‘충격과 공포’ 정책들에 대해 미국 안팎의 거센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트럼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지기반인 백인 노동자들은 주류 언론 뉴욕타임스·CNN 엘리트 기자들의 폭로 탐사기사보다 트럼프 140자 트위터의 간단 명료한 메시지를 더욱 신뢰했다.

차기 대선주자들도 트럼프의 소통과 설득 기법에서 배울 구석이 있다. 트럼프의 말과 글은 거칠기 일쑤지만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정치리더들도 소외계층에 몸을 더 낮추고 친숙한 어법으로 다가갈 일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하층민도 한번 들으면 알아들을 정도로 쉬웠다고 한다. 설법 때 바라문 귀족어 산스크리트(범어)를 쓸 것을 제자들이 권했지만 부처는 일반 민중의 세속어 프라크리트(방언)를 고집했다.

근간(近刊) 『불통의 아이콘 서울대생들이 소통을 한다』를 들추다 보면 엘리트와 기층민의 소통 일화가 나온다.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라는 서울대 언론정보학 강좌의 ‘소통 탐구’ 숙제를 받고 인근 고교의 폭력서클 ‘일진’ 남학생을 제 발로 찾아간 조현(22·사회학과)씨의 이야기다. “평생 마주칠 기회가 없고 앞으로도 그럴 마음조차 없던 ‘불량학생’의 사고방식이 나와 얼마나 다를까 궁금했다”고 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곱게 자란 범생, 공부벌레 여학생의 과감한 시도에 윤석민 담당교수도 놀랐다.

전국 성인남녀 8000명을 조사한 ‘2016 사회통합 실태조사’(한국행정연구원)를 보면 내 자녀가 계층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거라는 기대가 절반 남짓(56%)에 불과했다. 엘리트 때문에 나라가 두 동강 나지 않으려면 수저계급론이 기승을 부리는 토양을 더 이상 방치해선 곤란하다.

홍승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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