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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텔링] 농아인이 같은 농아인 속였다 … 500명 280억 사기친 ‘행복팀’

중앙일보 2017.02.10 02:24 종합 10면 지면보기
지난해 11월 초쯤 한 여성이 경남 창원 중부경찰서로 찾아왔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는데 말도 어눌하고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농아인이었다. A4 용지를 꺼내 4시간 동안 힘겹게 필담을 했다. 결국 같은 농아인인 친척과 친구들이 어떤 사업에 투자해 돈도 잃고 빚만 지게 돼 생활고 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농아인을 상대로 수사를 하다 보니 간단한 조사도 일일이 수화 통역사가 함께해야 했다. 그러던 중 범죄 해결의 단서가 나왔다. ‘행복팀’이라 불리는 조직이 네이버 밴드를 통해 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그런데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인 행복팀 조직원들이 모두 농아인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서로 전화통화를 할 수 없어 밴드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동영상·문자 등으로 지시나 전달 사항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수화 동아리로 위장한 ‘하보노파’라는 이름의 밴드에 들어가봤다. 입이 딱 벌어졌다. 이들이 단순한 유사수신 단체가 아니라 조직폭력배 수준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목급에 해당하는 전·현직 총책 3명, 이들의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하는 총괄대표, 그 밑에 하얀팀·보라팀·노란팀·파란팀 등 4개 팀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 4개 팀의 앞 글자를 따 밴드 이름(하보노파)을 지었다고 한다. 하얀팀은 대전과 인천, 보라팀은 경기, 노란팀은 부산과 창원, 파란팀은 대구를 나눠 맡았다. 농아인들로부터 충성맹세를 받았다. ‘변심하면 3대를 거지로 만들어 주겠다’ ‘배신하면 죽인다’ 등 행동강령도 있었다. 한밤에 카톡 점호도 했다.
집 담보 비싼 대출 받게 해 빚더미 앉혀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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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개월의 수사 끝에 결국 9일 사기 및 범죄단체조직 등의 혐의로 총책 김모(44)씨 등 8명을 구속하고, 팀장 등 28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행복팀(전체 조직원 34명, 비조직원 2명)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7년간 500여 명의 농아인들을 상대로 “아파트나 공장 등을 짓는 사업에 투자하면 3개월 내에 투자금의 3~5배를 돌려주겠다”고 유혹했다. 이 말에 속은 농아인들이 이자가 비싼 제2금융권으로부터 집·차량 담보 대출이나 신용대출을 받게 했다. 결국 농아인들의 돈 280억원을 빼돌렸다. 뿐만 아니라 농아인들에게 “투자 수익이 좋으면 집이나 고급차·연금도 주겠다”고 달콤한 말로 유인했다.

행복팀 조직원들은 보호자를 사칭해 농아인들이 대출을 할 때 금융기관에 가서 투자금을 송금하도록 하거나 1만원권이나 5만원권 현금으로 돈을 받아갔다. 이 돈은 각 지역 팀장과 대표 등을 거쳐 총책들에게 전달됐다. 농아인들은 적게는 200만~300만원, 많게는 7억원까지 투자했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3개월이 지나도 수익금은 물론 투자금도 돌려주지 않았다. 일부 농아인이 속았다고 생각해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하거나 조직을 탈퇴하려고 하면 행복팀 조직원 4~5명이 몰려가 회유와 협박을 가해 포기하게 만들었다. 일부 농아인들은 경찰을 믿지 않고 “(나는)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제일 높은 분’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려고 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진술을 거부하기도 했다. 철저하게 속아 넘어간 때문이다.

행복팀은 수화를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면서 총책 김모씨를 사실상 신격화했다. 김씨가 농아인들에게 살 집을 주고 공장을 지어 취업도 시켜 주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게 했다.
돈 가로챈 범인들은 외제차 굴리며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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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김씨는 돈 많고 나이도 많은 ‘90대 재력가’로 포장했다. 여자 총책(46) 한 명을 통해서만 지시를 내리고 돈을 받아 챙기면서 철저히 신분을 숨겼다. 사이비 종교집단처럼 세뇌교육을 받은 농아인들은 김씨가 자신들을 행복하게 살게 만들어 줄 ‘구세주’ 정도로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딴판이었다. 김씨는 원래 목욕탕 때밀이와 세차 등의 일을 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 등은 사기 친 돈으로 명품 옷이나 포르셰·마세라티·벤츠 등 외제차 수십 대를 산 것으로 드러났다. 전체 280억원의 투자금 중 행복팀에 남은 돈은 7억원 정도였다.

총책 김씨는 현재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창원=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수사 내용과 피해자들의 진술 등을 토대로 김대규 창원 중부경찰서 수사과장의 시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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