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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의 지성과 산책] “대한민국 건국과 정부수립이 뭐가 다른가, 다 말장난”

중앙일보 2017.02.08 01:55 종합 16면 지면보기
올해 우리 나이로 80세를 맞는 한영우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정년 이후 20여 권의 책을 펴내며 어느 현역보다 더 현역 같은 일상의 반복을 이겨낸 힘은 30대 초반 겪은 ‘고통의 체험’이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올해 우리 나이로 80세를 맞는 한영우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정년 이후 20여 권의 책을 펴내며 어느 현역보다 더 현역 같은 일상의 반복을 이겨낸 힘은 30대 초반 겪은 ‘고통의 체험’이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정년 퇴임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2003년 퇴임 이후 14년 동안 2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과거, 출세의 사다리(전4권)』 『한국선비지성사』 『조선왕조의궤』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다시 찾는 우리역사(전면 개정판)』 등 본격 역사서들이다. 한영우(80)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얘기다. 『다시 찾는 우리역사』는 가장 많이 읽히는 한국사 통사로 꼽히며, 영어·중국어·일어·러시아어로도 번역됐다. 『율곡 이이 평전』 『우계 성혼 평전』 『꿈과 반역의 실학자 유수원』 같은 인물 평전도 정년 후에 계속 펴내고 있다.

한영우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조선 국가이념, 대한제국 평가 등
잘못된 부분 바로잡는 게 더 중요

성인 반열 율곡도 핸디캡 투성이
출가했다 환속, 성균관에선 왕따

역사가와 이념은 불가근불가원
실천 쪽에 참여하면 학자로선 끝

“내가 골프를 치나 술을 마시나…, 할 일이 없어서 그래요.” 이렇게 말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관악구 낙성대 부근 개인연구실을 매일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4시30분 퇴근하며 현역보다 더 현역 같은 일상을 반복하게 하는 힘은 뭘까. ‘고통의 체험’이었다. 30대 초반 서울대 전임강사 시절 겪은 고통이 그를 한눈 안 팔고 ‘학자의 길’을 걷도록 채찍질했다.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외롭게 했다. 전두환 정부 이래 역대 정권에서 각종 관직 제안이 있었지만 국사편찬위원장직을 비롯한 모든 제안을 단번에 뿌리쳤다고 한다.
평전을 계속 쓰고 있는데 다음은 누굽니까.
“『정조 평전』(가제)이 곧 나옵니다. 역사연구 할 때 인물 캐릭터(성격) 연구가 중요합니다. 업적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인간 내면에 대한 연구는 잘 안 되고 있는 실정이죠.”
평전은 인간의 내면 탐구 작업이군요.
“공부 스타일에 두 가지가 있어요. 머리로 공부하는 사람과 가슴으로 공부하는 사람. 같은 성리학을 공부해놓고 왜 정몽주는 혁명을 반대했고 정도전은 혁명가가 되었을까요. 정몽주는 머리로 배웠고, 정도전은 가슴으로 배웠습니다. 정몽주처럼 부유한 집안 출신은 가슴으로 잘 안 배우게 되죠. 아쉬운 게 없기 때문입니다.”
『율곡 이이 평전』도 펴냈는데 그는 어떤가요.
“율곡이 머리만 좋아서 대학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19살 때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가 1년 뒤 환속하죠.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유생들이 율곡을 옆에 앉지도 못하게 했어요. 왕따를 당한 거죠. 홍문관 벼슬을 제수받았을 때 자신은 자격이 없다며 고사를 합니다. 스스로 죽을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 갈등 속에서 성인이 되어갔습니다. 핸디캡을 가진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해내곤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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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수의 일생을 좌우한 아픔은 30대 초반에 찾아왔다. 서울대 전임강사가 되며 남부러울 게 없던 시절이다. 스승 한우근 전 서울대 교수의 권유로 국정교과서 제작(조선시대 담당)에 참여한 것이 발단이었다. 요즘과 달리 그 당시 국정교과서는 원로 국사학자들의 합의에 의해 진행됐다고 한다.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우리의 연구가 많이 축적되지 않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 왜곡을 걸러내기 어려우니 그걸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년 넘게 준비해온 국정교과서가 출판될 때는 유신헌법이 통과된 직후였어요. 유신 이야기가 반쪽 분량 정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죠. 때문에 유신 교과서라는 비판을 받았고 나는 어용교수로 몰렸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극복한 것은 공부를 통해서였다.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고 난타를 당하니까 한때 학계를 떠나려고까지 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지, 내가 살려면 내가 학문을 더 해서 큰 학자가 되는 길밖에는 없다, 그런 마음이 지금도 있습니다.”
한국사 서술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가치는.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둬야합니다. 역사가와 이데올로기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입니다. 너무 멀리하면 아무 이념도 없고 가치관이 빠진 역사가 되죠. 너무 가까이하면 이미 결론이 나와 있게 되죠.”
주관을 뺀 객관적인 역사 서술이 가능할까요.
“나 역시 몰가치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치에 매어서 살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정치에는 거리를 둡니다. 너무 실천 쪽에 참여하면 나도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데올로기 없이 실천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 학자로서 끝난 것입니다. 내가 시간이 많다는 것도 의도적으로 나를 외롭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 최종본이 공개됐는데요.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대한민국 수립’이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그것만 가지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건국이나 정부수립이나 다 똑같은 말 아닌가요, 이거는 말장난이에요. 수립이나 건국이나 뭐가 달라요. 사실은 그 위가 더 중요해요.”
그 위가 뭔가요.
“조선시대 국가이념을 ‘농본주의’라고 해놓았더군요. 그럼 고려나 신라는 농본주의 아닌가요? 또 대한제국 때 광무개혁을 실시했다고 해놓고는 복고적이고 민권탄압을 했다고 써놨더군요. 그러면 광무개혁은 나쁘다는 뜻이지요. 대한제국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많이 축적되어 있는데 별로 반영이 안 되었어요. 조선과 대한제국을 깎아내리면 그것을 멸망시킨 일제시대가 밝아지게 되죠.”
고종과 명성황후가 개혁을 잘 못해서 일본에 패한 것 아닌가요.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선 일제가 만들어 놓은 너무 안 좋은 선입관들이 우리 사회에 이미 자리잡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산업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이뤄지죠. 우리도 19세기 초에 그런 흐름을 타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세도정치에 일차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고종이 근대화 정책을 펼쳤고 상당히 성과를 냈지만 일본의 속도와 야욕을 못따라갔습니다. 출발이 너무 늦었습니다.”


글=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인터뷰 전문(全文)은 중앙일보 온라인(joongang.joins.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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