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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안희정의 녹색성장·창조경제

중앙일보 2017.01.26 00:20 종합 26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힐러리 클린턴에게 버니 샌더스는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지금은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힐러리가 이겼다면 샌더스가 일등공신이었을 것이다. ‘월가의 대변자’ 힐러리는 샌더스에 의해 왼쪽으로 크게 한걸음을 디뎠다. 최저임금 15달러, 대학 무상교육, 건강보험 개혁… 샌더스가 해낸 일이다.

부정·분열·단절·공짜 대신
긍정·통합·계승·공정 말해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대권 출사표를 보며 샌더스를 떠올렸다. 그는 야당의 잠룡 중 유일하게 오른쪽으로 크게 한발을 디뎠다. 재벌 개혁을 말했지만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불구속은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고 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엔 반대하지만 한·미 정부 간 합의는 존중한다고 말했다. 경제는 노태우부터 6명의 대통령, 30년의 축적을 이어받으면 된다고 했다. 노태우의 토지공개념, 김영삼의 세계화, 김대중의 정보기술 육성, 노무현의 혁신경제, 이명박의 녹색성장, 박근혜의 창조경제로 충분하다고 했다. 30년 대통령 경제학을 뭉뚱그려 안희정은 ①개방과 통상을 통한 ②혁신 주도형 ③공정한 민주주의 시장경제로 녹여냈다. 각론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새누리당까지 좌클릭 포퓰리즘에 빠져 있는 대선판에서 “국민은 공짜를 원하지 않는다”는 그의 목소리는 신선하다. 그는 이를테면 부정 대신 긍정, 분열 대신 통합, 단절 대신 계승, 공짜 대신 공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이 오늘 대한민국 정치인의 언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정치인의 언어는 ‘정치적’일 수 있다. 이를테면 정치공학자들의 해석은 이런 것이다. ①안희정은 문재인의 의도된 샌더스다. 그는 문재인과 지지층이 다르다. 충청도가 기반이다. 중도+좌클릭 보수에 어필한다. 비문(非文)과도 통한다. 안희정의 지지율 4%는 문재인이 그렇게 확장하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영역에 있다. 문재인은 안희정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연스레 대세론에 올라탈 수 있다. ②안희정의 역할은 민주당 경선 이벤트 효과 극대화다. ‘벚꽃 대선’이 유력한데, 벚꽃 대선은 시간 싸움이다. 경선 효과로 대세론에 불을 지펴야 단숨에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안희정이 뜰수록 경선 효과가 커진다. 이벤트 없는 경선은 상대 진영에게 반전의 빌미를 줄 수 있다. ③안희정은 자신의 대권보다 민주당의 수권을 더 원한다.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운동권 출신의 순수함이 살아있다. 경선 불복 위험도 없다. 박원순, 김부겸 등 자칫 제3지대로 튈 수도 있는 야권 잠룡들을 묶어놓는 효과도 있다. (안희정은 “지려고 링에 오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①②③을 모두 부인했다.)

이런 정치공학의 분석이 다 맞는다 해도 나는 안희정의 정치 언어를 지지한다. 진영을 가르고 패를 나누는 건 정치가 할 일이 아니다. 문재인은 노무현 정신 계승을 말하며 노무현 따라쟁이의 길을 걷고 있다. “탄핵 실패 땐 혁명” “친일·독재, 적폐 청산”을 외친다. 거친 그의 언어는 노무현의 나쁜 유산, 편 가르기를 답습하고 있다. 대통령이 될 수는 있겠지만 되고 나면 100% 실패할 것이다. 광화문이 1년 뒤엔 문재인을 끌어내리려는 태극기와 이를 막으려는 촛불로 뒤덮이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겠나. 그렇게 되는 순간 대한민국에 더 이상 미래는 없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위험의 징조도 있다. 21일 광화문 13차 촛불집회는 진영의 막장을 보여줬다. 광장 한복판에 박근혜 대통령의 나체 성행위 그림 걸개가 걸렸다. 저질스럽기가 표창원이 국회에 걸도록 한 그림은 저리 가라다. 최순실의 박근혜만큼, 나는 그 포르노그래피가 수치스러웠다. 문재인이 촛불을 이끌고 도착하려 했던 종착역이 바로 여기인가. 한 번 폭주한 광장의 힘은 사람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물어뜯을 것이다. 문재인도 예외일 수 없다.

두 달 뒤(탄핵 결과 발표), 또는 넉 달 뒤(대통령선거) 대한민국이 완전히 둘로 쪼개지지 않으려면 화합의 정치, 포용의 경제를 말해야 한다. 그 희망의 싹을 나는 안희정의 문법에서 읽었다. 그러므로 나는 안희정이 문재인의 샌더스로 끝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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