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호
논설위원
신사임당은 우리네 지갑도 접수했다. 5만원짜리 지폐 얘기다. 조선 최고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등장하는 1만원권을 일찌감치 밀어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9년 처음 나온 5만원권의 지난해 화폐 발행잔액(한국은행이 공급한 화폐 중 시중에 남아 있는 금액)은 75조7751억원. 1만원권은 16조2446억원에 그쳤다. 5만원권의 쓰임새가 그만큼 넓어진 것이다. 세뱃돈도 이제는 5만원권이 널리 쓰이고 있다.
내일 시작되는 설 연휴를 앞두고 어른들과 아이들의 희비가 갈린다. 어른들의 걱정거리 1위가 세뱃돈(모바일 광고 플랫폼 캐시슬라이드 조사)인 반면 아이들이 설을 기다리는 가장 큰 이유 또한 세뱃돈(중앙일보 청소년매체 TONG 조사)이다.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새해 안녕을 기원하는 세배가 애물단지가 된 모양새다. 세뱃돈 때문에 으스대거나 풀이 죽은 아이들의 대비가 눈앞에 그려진다.
세뱃돈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예전에는 아이들에게 주로 떡과 과일을 줬다. 돈을 주더라도 마음을 앞세웠다. 새해 첫날 주머니가 텅 비면 1년 내내 가난할 수 있다는 뜻에서 작은 정성을 전했다. 그래서 복돈이라 불렀다. 부모에게 절을 하자마자 “세뱃돈은요” 하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절값 예약 받고/세배 오는 조무래기들을/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홍진기 시인의 ‘쓸쓸한 세뱃돈’)
세뱃돈보다 중요한 건 덕담이다. 우리 세시풍속에서 설날 덕담은 ‘그렇게 되라’고 축원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렇게 됐다니 고맙다’고 미리 축하하는 것이었다. 언어의 주술적 힘이다. 예컨대 ‘올해 부자 되세요’가 아니라 ‘부자가 되었다지요’ 식이다. 2017년 한국 사회에 덕담 몇 개를 건넨다. ‘둘째를 낳았다지요’ ‘정규직이 되었다지요’ ‘월급이 올랐다지요’ ‘학원비가 팍 줄었다지요’ ‘금강산 관광 다녀왔다지요’ ‘대통령 걱정을 안 한다지요’. 김종길 시인의 소망도 전한다.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서도/(중략)/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를 보듯/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설날 아침에’)
박정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