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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 따라 사실이 달라진다? … 백악관의 ‘대안적 팩트’

중앙일보 2017.01.24 03:30 종합 3면 지면보기
22일(현지시간) 미국의 주요 언론에는 ‘대안적 팩트(alternative facts)’라는 새로운 용어가 전면에 등장했다. ‘실제로 있는, 입증할 수 있는, 거짓이 아닌 사실’을 뜻하는 단어(fact)와 대안·대체를 의미하는 단어(alternative)의 조합은 언뜻 봐도 논리적이지 않다. 그런데 ‘팩트를 대체한다’는 기이한 논리를 처음 주창한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인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고문이다. 이날 미 NBC방송의 프로그램 ‘미트 더 프레스(Meet the Press)’에 출연한 콘웨이는 거짓 논란을 일으킨 백악관 브리핑에 대해 “대안적 팩트를 제시한 것”이라는 해명을 내놓았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모인 인파(왼쪽)는 8년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보다 확연히 적었다. 그러나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사상 최대 규모가 모였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측과 미 언론들은 이를 두고 치열한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로이터=뉴스1]

지난 2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모인 인파(왼쪽)는 8년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보다 확연히 적었다. 그러나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사상 최대 규모가 모였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측과 미 언론들은 이를 두고 치열한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로이터=뉴스1]

거짓 브리핑 논란은 20일 열린 트럼프 취임식 참석 인원 공방에서 시작됐다. 취임식 당일 로이터통신은 2009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트럼프 취임식 인파를 비교하는 사진 2장을 공개했다. 사진은 내셔널 몰이 관중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2009년과 듬성듬성한 올해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줬다. 다른 언론들도 역대 최저 지지율로 출범한 인기 없는 정권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23일 CNN에 따르면 트럼프는 이런 언론 보도에 격분했고,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에게 관련 브리핑을 지시했다.

“듬성듬성한 취임식 인파” 보도에
백악관서 “사상 최대” 거짓 브리핑
콘웨이 백악관 고문 신조어 만들어
“해설·의견 섞어 팩트 흐리는 전략”

CNN “정부 발언 못 믿겠다” 신뢰성 우려

결국 취임식 이튿날 열린 첫 브리핑은 “역사상 최대 취임식 인파” “42만 명이 워싱턴DC 지하철 환승역을 이용해 오바마 때의 31만7000 명보다 많았다”는 등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었다. 스파이서는 질문도 받지 않고 4분30초간 브리핑을 했다. 이에 언론들은 더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WP) 등은 항공사진과 지하철 승객 통계를 제시하며 “왜 뻔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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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C에 출연한 콘웨이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인터뷰를 진행한 척 토드는 왜 첫 브리핑에서 거짓말을 했는지 물었다. 콘웨이는 “당신은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스파이서는 대안적 사실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진행자가 “대안적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 거짓말”이라고 반박했지만, 콘웨이는 도리어 언론을 문제 삼았다. 그는 “취임식 인파 보도야말로 언론이 트럼프를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협박도 덧붙였다.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을 향한 불편한 심기와 유불리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겠다는 정권의 속내가 드러난 셈이다.

“끊임없이 팩트체킹, 언론 역할 중요해”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 교수는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측면에서 트럼프 진영이 대안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명백한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고, 추정·해설·의견까지 사실로 엮어 완전히 새로운 사실을 창조하겠다는 전략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이 문제는 정부의 신뢰성 논란으로 확대됐다. CNN은 칼럼을 통해 “앞으로 트럼프 정부의 발언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NYT)도 “허위 정보는 독재나 실패한 국가에서나 통한다”며 “미국의 중요한 자산인 신뢰와 연관된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언론의 검증을 기득권층의 모함이라 주장했던 트럼프의 선거운동도 거론하며 “그런 작전을 백악관에서도 쓸 생각이냐”고 되물었다.

WP는 지난해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국제적 단어’로 선정한 ‘포스트-트루스(post-truth)’를 언급했다. 사전은 ‘포스트-트루스’를 “객관적 사실이 감정 호소나 주관적 신념보다 여론에 영향을 덜 미치는 상황”이라고 정의했다. 사전은 이 단어가 트럼프 대통령을 낳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분노에 불을 지피고, 감정을 증폭시킨 것이 트럼프의 선거 전략이었다는 지적이다. 사실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포스트-트루스’와 ‘대안적 팩트’가 일맥상통 한다는 것이 WP의 분석이다.

‘대안’이라는 용어가 잘못 쓰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반이민·반무슬림을 내세운 독일의 극우 포퓰리즘 정당의 이름은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다. 트럼프의 인기에 힘입어 미국에서 득세한 극우주의자들은 ‘대안우파(alt-right)’로 불린다. 부정적 이미지에 대한 ‘물타기’를 위해 ‘대안’이 사용된 사례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언론의 팩트체킹 기능을 강조했다. “사실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언론이 독립적으로 끊임없이 (사실을) 대중에게 전달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홍주희·김상진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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