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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균열 연작, 갈라진 그림 걸면 망한다며 안 사가”

중앙일보 2017.01.24 02:05 종합 22면 지면보기
추상화가 윤명로 화백의 개인전이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균열’ 연작, ‘익명의 땅’ 연작 등 60여 점이 전시된다. [사진 인사아트센터]

추상화가 윤명로 화백의 개인전이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균열’ 연작, ‘익명의 땅’ 연작 등 60여 점이 전시된다. [사진 인사아트센터]

“물이 아무리 맑아도 (고여 있으면) 썩어요.” 약 60년의 화업인생 동안 부단히 새로운 변화를 거듭해온 추상화가 윤명로(81) 화백의 말이다. 그의 개인전 ‘윤명로, 그때와 지금’이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3월 5일까지 열린다. 5개층의 전시장 전체에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물감이 갈라지는 크랙 현상을 의도적으로 활용한 ‘균열’ 연작을 비롯, 시대별 변화를 아우르는 유화를 중심으로 60여점을 선보인다. 얼레를 들고 연을 날릴 때처럼 긴장과 이완으로 자유로운 붓질을 선보인 ‘얼레짓’ 연작, 역동적인 붓터치가 두드러지는 ‘익명의 땅’ 연작,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역설적으로 추상의 영감을 얻은 ‘겸재예찬’ 연작 등 그의 작품은 10년 주기로 굵직한 변화를 맞곤 했다. 이같은 흐름은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와 궤를 같이하지만 구체적인 전시작은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윤명로 ‘익명의 땅’(1991, 181×227㎝). 린넨 위에 아크릴릭.

윤명로 ‘익명의 땅’(1991, 181×227㎝). 린넨 위에 아크릴릭.

무엇보다 전시장 1층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것은 “따끈따끈한 신작”이자 새로운 표현기법을 탐구 중인 작품들이다. 그림만 봐서는 짐작하기 어려운데, 듣자니 붓 대신 싸리비를 붓 삼아 그린 것이다. 작가는 “그 의외성을 활용, 붓으로 표현 안 되는 감정과 감성을 담아내고자 했다”며 “동양화도 지필묵만 아니라 머리털로도 그리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최근작에 종종 붙는 제목인 ‘고원에서’를 통해 예술가의 지향을 설명했다. “고원(高原)은 미답(未踏)의 세계에요. 작가들은 생전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 여태껏 없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역시나 최근 종종 쓰는 제목인 ‘바람 부는 날’을 통해서는 ‘추상’의 의미를 전했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는 것이 추상이죠.” 곧 이번 전시는 4년 전 대규모 회고전을 연 추상화의 원로이자 현재형 작가로 그의 작품을 조명하는 자리다.
‘바람부는 날’(2015, 112×194㎝). 린넨 위에 아크릴릭.

‘바람부는 날’(2015, 112×194㎝). 린넨 위에 아크릴릭.

젊은 시절 그는 국전에서 특선(1959년)을 한 것은 물론이고 국전의 권위에 반발, 동료들과 전시장이 아니라 덕수궁 돌담길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 이름하여 ‘60년 미술가협회전’이다. “예술에 위계가, 계급이 있다는 것이 싫었던 거죠.” 그는 요즘의 미술시장에 대해서도 뼈있는 말을 전했다. “예술이 종교와 같이 있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지금은 돈과 같이 있는 시절”이라고 했다. 새로이 조명받는 그의 ‘균열’ 연작이 초창기 개인전에선 “갈라진 그림을 걸면 망한다”며 도통 안 팔렸단 일화도 흥미롭다. 전시장 한켠에는 최근작 판화도 여럿이다. 흑백만으로 추상의 쾌감을 전하는 이 작품들은 1968년 한국판화가협회 창립멤버였던 그의 이력을 떠올리게 한다.
‘고원에서MXII-1029’(2012, 18×291㎝). 린넨 위에 아크릴릭.

‘고원에서MXII-1029’(2012, 18×291㎝). 린넨 위에 아크릴릭.

전시를 주최한 가나문화재단 김형국 이사장은 특히 얼레짓 연작을 두고 “마구 흔들리는 사람 마음 같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죽(風竹)같이 보이기도 한다”며 “동양화이기도 하고 서양화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다양한 화풍으로 일관되게 추상화를 그려온 작가의 전시작 중 유일하게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1956년 대학 1학년 때 그린 ‘무제’다.

60년 화업인생 윤명로 개인전
“물 고이면 썩어” 부단한 변화 추구
유화·판화 등 시대별 대표작 선보여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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