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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앙의 서울이야기] (23) 안위를 넘어선 자유, 자유를 향한 애정

중앙일보 2017.01.21 00:24 종합 17면 지면보기
사랑보다 중요한 건 진실, 거짓을 벗어던져 자유로워져야
가끔은 자기 자신을 거슬러 사고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안전하지만 비좁은 오솔길을 벗어나 다소 두렵고 낯선 길로 발걸음을 내디뎌 보는 것이다.

며칠 전 갈리마르출판사에서 보내온 푸짐한 소포가 도착했다. 그때부터 나는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책에 푹 빠져 지내고 있다. 그 어느 프랑스인보다 더 뛰어나게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이 루마니아 작가 덕분에 나는 요즘 말과 글에 대해 모처럼 의미 있는 사색을 즐기는 중이다.

우리는 왜 말을 하는가. 왜 글을 쓰는가. 우리 안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이 모든 혼잣말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말이란 과연 현실을 반영할까. 가령 슬플 때 그 슬픔을 누구나 사용하는 언어에 실어 표현하지만, 그 순간 나의 슬픔이 정녕 내 이웃의 슬픔과 동일한 것일까. 언어란 현실에 울타리 치고, 존재를 꼼짝 못하게 옥죄는 ‘의미의 감옥’이 아닐까.

시오랑은 인간의 거짓과 위선, 환상을 파헤치고 추적하는 일에 매진한다. 예컨대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라는 책에서 기발한 유머를 담은 이런 발언들. “우리는 이따금 폭식하고 싶어진다. 이것저것 먹어 치우기보다는 속 시원히 토해 버리는 맛에 취해서.” 그렇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관계의 식습관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시오랑은 또한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고 계속 전진하려면 지금의 신념조차 저울질할 담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건강에 반하는 욕망들, 자기 파괴의 충동과 몰락을 탐하는 취향이 우리 내면에 잠복해 있다는 사실은 현대 심리학의 상식이다. 우리는 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무엇 때문에 중독의 길로 빠져들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자기 상실의 매듭을 끊어야 한다. 두려움 없이, 아무런 치장 없이 나를 직시할 맑은 시력을 회복해야 한다.

격정의 찌꺼기, 타락을 향한 미련과 병적인 욕망을 비워 낸 자리에 건강한 기쁨을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책무다. 이상화된 삶, 꿈으로 치장한 존재는 나만의 배꼽을 중심으로 아로새긴 문양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한 자세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 그가 갈망하고 사랑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 전격적인 삶이다.

시오랑에게 서구 사회는 좋은 냄새로 포장한 부패물, 향수 뿌린 시체와도 같다. 그러나 사랑은 어떤 조건도 전제도 가미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나 자신이든 상대든 그럴듯하게 치장함으로써 합리화하는 애정이 진정한 사랑일 수 없는 이유다.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 안에서 사랑하는 것, 모든 거짓을 벗어던져 사랑할 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오랑은 충고한다, 자기 영혼 속에 거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핍박하거나 거부하지 말라고. 무작정 통제하려 들지 말고, 춤추게 내버려 두라고. 그는 쓰고 있다. “억눌린 기도(祈禱)가 신랄한 조롱으로 돌변하는 법이다.” 두려움으로 위축된 삶을 감내한다는 건 반수 상태의 의식에 머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잠을 깨우는 인연, 자유를 포기하지 않도록 자극이 되어 주는 사건은 일상의 흔한 선물이 아니다. 각자 한 걸음 한 걸음 안위 그 너머를 향한 애정으로 찾아나서야 할 보물이다.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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