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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땅에 있는 조상 묘 1500만 기, 안 옮겨도 된다

중앙일보 2017.01.20 01:42 종합 14면 지면보기
2011년 12월 A씨는 자신이 소유한 강원도 원주시의 임야에 설치된 B씨 조상의 분묘 6기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B씨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B씨는 “최소 고려시대부터 집안에서 관리해 온 묘”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결국 A씨는 B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년간 점유 땐 권리 인정 관습법
땅 소유자 “재산권 과도 침해” 소송
대법 “2001년 장사법 이전 설치 묘
관습법 권리 인정해야” 판결

1, 2심 재판부는 “A씨가 땅의 소유자라도 묘지를 옮기게 할 권한은 없다”며 분묘 6기 중 설치된 지 20년이 넘은 5기에 B씨의 ‘분묘기지권’을 인정했다. 분묘기지권은 타인의 토지에 분묘를 조성했더라도 일정 기간 이상 관리했다면 계속해서 분묘 주변의 터를 방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다. 민법 조문에는 없지만 대법원은 이를 ‘관습법’으로 인정해 왔다.

그러자 A씨는 분묘기지권이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며 대법원으로 법정 다툼을 이어 갔다. 화장을 택하는 비중이 늘면서 장묘 문화가 바뀌고 있고, 2001년 ‘장사 등에 관한 법률(장사법)’이 시행되면서 땅 주인의 허락 없이 만든 분묘의 분묘기지권은 효력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19일 A씨가 제기한 분묘 철거 소송 상고심에서 “일부 묘지에 대해 B씨 측이 분묘기지권을 시효취득했다”는 원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타인 소유 토지에 소유자의 승낙 없이 분묘를 설치했어도 20년간 평온하고 공연하게 분묘를 점유했으면 분묘기지권을 취득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법의 시효취득 규정은 부동산을 소유할 목적으로 20년간 평온하게 점유하면 그 소유권을 인정한다. 재판부는 “사설 묘지의 설치가 허용되는 등 매장 문화가 아직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장묘 문화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분묘기지권에 대한 인식이 소멸됐다고 할 증거는 없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장사법과의 관계에 대해선 “장사법에서는 법 시행 이후 설치된 분묘에 대해서만 적용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법 시행 이전에 설치된 분묘의 분묘기지권을 소멸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국내에 타인 소유의 토지에 설치된 분묘는 약 1500만 기로 추산된다. 매장 풍습은 오래전에 생겼지만 임야에 대한 법적 소유권은 1908년에 삼림법 제정으로 확립됐다. 이 때문에 곳곳에서 갈등이 빚어져 왔다.

분묘기지권을 인정한 대법원의 첫 판결은 1955년에 나왔다. 변모씨 집안은 1850년대부터 자신들이 소유한 전남의 한 야산에 분묘를 설치해 관리해 왔다. 변씨는 1900년께 김모씨에게 이 산을 팔았지만 분묘는 옮기지 않고 그대로 관리했다. 이 땅을 물려받은 김씨의 아들이 1944년 변씨 집안의 묘에서 약 17㎝ 떨어진 곳에 김씨의 묘를 설치하자 변씨 집안은 무덤을 옮기라고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대법원은 “김씨가 변씨 집안의 묘지를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변씨 집안이 토지 소유권을 넘겼더라도 20년간 제사를 모셔 왔다면 분묘와 주변 토지에 대한 권리는 인정된다는 판결이었다. 19일 62년 만에 대법원에서 이를 재확인하는 판결이 나옴에 따라 남의 땅에 있는 조상의 묘를 그대로 둘 수 있게 됐다.
 
◆분묘기지권(墳墓基地權)
타인의 토지에 조성된 분묘라도 20년 이상 유지·관리했다면 계속해서 묘 주변의 땅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권리. 명문화된 법 조항은 없지만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이를 인정해 왔다. 분묘가 남아 있고 관리를 계속하는 한 이 권리는 유지된다.

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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