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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주잔 영상’에 당한 반기문 측 “저쪽은 박사급, 우리는 초등생”

중앙일보 2017.01.19 02:08 종합 10면 지면보기
대통령 선거가 앞당겨질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정치권에 ‘가짜 뉴스(fake news)’ 경계령이 내려졌다. 사실이 아닌 허위 내용이 마치 진짜 뉴스처럼 포장돼 소셜미디어와 언론을 통해 퍼지는 일이 확산되면서다.

순식간에 번지는 ‘페이크 뉴스’
13초짜리 퇴주잔 동영상은 짜깁기
경찰차 부순 촛불시위 글도 허위

가짜 뉴스는 이미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다. 지난해 미국 대선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나서 “아주 잘 포장돼 페이스북이나 TV에서 보면 (진짜 뉴스와) 똑같이 보인다”고 우려를 표명했을 정도다.

중앙선관위가 강력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건 한국에서도 이미 가짜 뉴스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건을 맡은 서석구 변호사가 지난 5일 탄핵심판 2차 변론에서 “촛불집회에서 경찰 병력 113명이 부상당하고 경찰차 50대가 부서졌다”고 주장하자 일간베스트 등 보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파손된 버스 사진과 함께 뉴스 기사 형식의 글이 퍼졌다. 하지만 본지가 18일 경찰청에 확인한 결과 “경찰 부상과 버스 파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짜 뉴스가 무서운 건 삽시간에 퍼지는 속도 때문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4일 충북 음성 부친의 선영에서 제례한 뒤 퇴주(退酒)를 음복(飮福)하는 장면을 담은 13초짜리 동영상은 최근 인터넷을 달궜다. 반 전 총장이 술을 받자마자 음복부터 하는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각종 인터넷 매체는 ‘반기문 퇴주잔 논란’이라는 기사를 앞다퉈 송고했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의 1분40초짜리 동영상에는 음복하기 전 술을 받아 원을 그리며 잔을 두 번 돌리고, 술을 버린 뒤 다시 받는 장면도 포함돼 있었다. 반 전 총장 측이 뒤늦게 “짜깁기한 동영상”이라고 해명했지만 주요 포털 사이트가 ‘퇴주잔’이란 검색어로 뒤덮인 이후였다.

가짜 뉴스는 언론과 정치인을 속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일부 방송사는 당시 한창이던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여성 대통령의 끝을 보려면 한국의 여성 대통령을 보라”고 발언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 보도는 한 네티즌이 페이스북에 올린 합성사진을 보고 사실 확인 없이 쓴 오보였다. 최근에는 야권의 대선후보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반 전 총장의 후임인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반 전 총장의 대선 출마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했다’는 발언을 담은 가짜 뉴스를 본 뒤 라디오에 출연해 이를 언급하는 실수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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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짜 뉴스에 벌써부터 각 선거캠프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반 전 총장 측은 “상대는 박사급인데 우리는 초등학생 수준”이라며 “가짜 뉴스의 피해가 엄청나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18일 대구 한국청년회의소 임원을 만난 자리에서 “왜 할 일 많은 젊은 분들이 페이크 뉴스라든지 가짜 뉴스, 남을 헐뜯는 것에 기쁨을 느끼냐”며 “대한민국 국민이 할 일이 아니다. 이런 걸 고쳐야겠다”고 말했다. 이날 더불어민주당 회의에서도 “민주당과 당 대선후보를 겨냥한 악성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양향자 최고위원)는 공개적인 우려가 나왔다.

안민호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의도적인 가짜 뉴스는 명백한 범죄 행위”라며 “언론도 허위 사실이 무분별하게 기사로 둔갑하지 않도록 엄격한 규칙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허진 기자, 대구=박성훈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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