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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전의를 잃은 개는 꼬리를 만다

중앙일보 2017.01.18 21:45 종합 34면 지면보기
이정재 논설위원

이정재
칼럼니스트

꼬리를 마는 것은 선제적 대응이 아니다. 그냥 도망가는 것이다. 내일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보는 한국 정부의 눈에는 겁이 잔뜩 들어 있다. 두 달 전 장명진 방위사업청장은 “트럼프 정부가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장 청장과 국방부는 즉각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은 트럼프 정부의 생각은 어떨까. 두 개의 장면이 더 있다.

트럼프에 지레 겁먹으면
싸우기도 전에 다 잃는다


 하나.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지난주 뉴욕을 찾았다. 그는 출국 전 “트럼프 경제팀과 일면식도 없다. 월가를 통해 접촉면을 늘려보려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경제팀은 청문회를 핑계로 유 부총리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유 부총리는 블랙스톤 회장을 만나 “대미 무역흑자를 줄이는 다양한 방법을 검토 중이니 이를 새 정부에 전달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 동맹국의 부총리가 이런 ‘무대접’을 받고도 ‘알아서 매를 먼저 맞겠다’며 꼬리를 만 채 돌아와야 했는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지 말았어야 했다.

 둘. 지난달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가스업계 사장들과 만나 “미국과 셰일가스 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직설 화법으로 풀면 ‘미국산 가스 수입을 늘려 달라’는 주문이다. 사장들은 취지엔 공감하면서도 황당해했다고 한다. 가스 수입은 대개 20년짜리 장기 계약이다. 첫 물량 도입 5년 전쯤 미리 계약한다. 지금 계약해도 5년 뒤에나 들어올 수 있다. 당장 물량을 늘리려면 현물 시장에서 사와야 한다. 가격이 맞고 수요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럼에도 주 장관의 아이디어는 정부의 ‘2017 경제정책방향’에 트럼프 정부의 통상 압력 대책 첫 줄에 들어갔다. 산업부는 “셰일가스 도입은 일석삼조다. 중동산과 경쟁을 붙여 수입가를 낮출 수 있다. 수입선 다변화는 물론 트럼프의 통상압력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 해 긴급 수입물량이 500만t, 약 20억 달러가 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2015년 말 현재 258억 달러였던 대미 무역 역조를 크게 줄일 수 있는 규모다. 그런 좋은 패라면 벌써 깔 필요가 없다. 미국산 가스는 수송비가 더 들어 아직 중동산보다 비싸다. 협상이 꼬일 때 히든카드로 얼마든지 쓸 수 있다.

 트럼프는 규칙(룰)보다 거래(딜)를 중시한다. 시쳇말로 “정의보다 경제다.” 거래에선 자신의 패는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는 게 승리의 비결이다. 트럼프는 “나는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야 상대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왔다. 그런 트럼프에게 미리 패를 다 보여주면 나중엔 뭘로 응수할 건가.

 대통령 취임 후는 취임 전과 같을 수 없다. 대통령을 주식으로 치면 당선된 날이 상한가다. 이후 등락을 거듭하며 주가가 오르다가 취임 날부터 하락하기 시작한다. 트럼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벌써 조짐이 있다. 트럼프 효과가 줄어들고 있다. 10년짜리 미 국채의 실질 수익률이 반 토막 났고, 다우지수는 20000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시장이 트럼프노믹스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트럼프는 감세와 규제완화를 말하지만 그의 롤모델인 도널드 레이건도 취임 1년 뒤인 1982년 대규모 증세를 받아들였다. 재정 적자가 심해지자 빗발치는 증세 여론을 감당하지 못해서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그의 보호무역주의는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7일 다보스 포럼에서 “보호무역은 어두운 방에 자신을 가두는 것”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기업을 윽박질러 미국에 주저앉혔다고 희희낙락할 것도 아니다. 당장은 득이 될지 모르나 세계의 분업체계와 공급망을 뒤흔들면 미국이 먼저 다칠 수 있다. 지금까진 세계가 트럼프의 눈치를 봤지만 이제부턴 트럼프가 세계의 눈치를 봐야 한다.

 우리가 트럼프의 미국을 상대할 땐 이런 변수들을 종합적으로 면밀히 따져야 한다. 미리 패를 보여주고 꼬리를 말 필요는 없다. 전의를 잃은 개는 꼬리를 만다. 상대의 처분만 바랄 뿐이다. 맞아 죽지는 않겠지만 굶어 죽을 것이다. 선제적 대응이란 무작정 꼬리를 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정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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