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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가 사임당=현모양처 왜곡…강단 있게 재능 뽐냈던 여성 군자”

중앙일보 2017.01.18 01:08 종합 22면 지면보기
26일 방송 시작하는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이영애(46)의 ‘대장금’ 이후 13년 만의 방송 복귀작이어서 관심이 뜨겁다. 송승헌과 호흡을 맞춰 천재적 예술혼, 불멸의 사랑을 불사르는 1인2역을 선보인다. 현대·과거를 오가는 퓨전사극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극 중 두 사람의 로맨스는 허구다. 적어도 소설가 이순원(59·사진)씨에 따르면 그렇다. 신사임당의 ‘외도’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서다. 문제는 재미를 추구하는 드라마야 그렇다 쳐도 사임당에 대한 오해는 드라마 바깥에도 많다는 점이다. 가령 현모양처의 대명사처럼 고정된 사임당의 이미지도 선량하게만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육영수 여사의 국모(國母)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임당의 덕성을 강조한 결과 ‘사임당=현모양처’ 등식이 굳어졌다는 얘기다. 연장선상에서 사임당이 5만원권 화폐 인물로 등장하자 일부 여성 단체가 반발하기도 했다.
이순원 신작 『정본소설』사임당?

이순원 신작 『정본소설』사임당?

이순원씨는 “때문에 사임당에 대한 정본(定本)소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17일 밝혔다. 아들 이율곡이 쓴 ‘선비행장(先行狀·어머니의 행적에 대한 글)’, 당대 주변인물들의 묘갈문(墓碣文·비석에 새겨진 행적 기록) 등 다양한 자료를 섭렵해 『정본소설 사임당』(노란잠수함)을 쓴 이유다.

『정본소설 사임당』 펴낸 이순원
율곡과 당대 주변인물 자료 섭렵
“그림 위해 자주 외출한 사실 감추려
송시열 등이 산수화 폐기했을 수도”


이씨는 “사임당의 이름부터 잘못 알려져 있다”고 했다. 인터넷 백과사전 등 대부분의 자료에 ‘신인선(申仁善)’으로 돼 있는데 이는 90년대 출간된 한 동화에서 임의로 그렇게 쓴 후 잘못된 인용이 반복된 결과다. 이씨는 “가장 믿을 만한 자료인 율곡의 ‘선비행장’에는 사임당의 이름을 ‘모(某)’라고만 표현했다”고 밝혔다. 임금이나 부모의 이름을 쓰기를 꺼린 당대의 관습 때문이다. 사임당의 진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화가 난 사임당이 공자·주자의 예법을 따지며 나눈 부부간 대화도 근거가 없다. 인터넷에 버젓이 사실처럼 나돌지만 조선 후기 문신 정래주가 사임당 사후 180년이나 지나 지은 『동계만록』에 나오는 일화로 팩트가 아니라는 얘기다.

왜 이런 왜곡이 생겨난 걸까. 율곡을 따랐던 송시열 등 조선 후기 문인들이 대학자 율곡을 기리기 위해 어머니 사임당을 현숙한 부인으로 덫칠하는 데 골몰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이씨는 “사임당의 산수화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다. 여성들의 바깥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던 시절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집밖에 나갔다는 사실은 파격 중의 파격이어서 송시열 등이 이를 은폐하려 했을 거라는 주장이다. 이씨는 "사임당의 많은 산수화를 폐기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율곡의 서모가 악처였다거나 사임당이 세상을 떴을 때 집안 형편이 극히 좋지 않았다는 얘기도, 율곡의 고난 극복 스토리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왜곡일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사임당은 여성 군자 같은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유교 이념에 충실하면서도 강단 있게 예술적 재능을 뽐냈다”고 했다. 율곡이 유일한 스승으로 어머니를 꼽을 만큼 조선 시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지폐에 등장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얘기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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