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데렐라, 백마 탄 왕자 모두 아웃…이젠 PC 시대

중앙일보 2017.01.18 01:05 종합 22면 지면보기
‘오버워치’ 게임에 나오는 60세 이집트 여성 전사 캐릭터 아나. [사진 블리자드]

‘오버워치’ 게임에 나오는 60세 이집트 여성 전사 캐릭터 아나. [사진 블리자드]

당신의 PC지수는 얼마인가. 지난해 미국 대선을 강타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은 최근 문화계에 가장 핫한 키워드로 떠올랐다. 미국의 보수적 유권자들은 과도한 PC 추구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며 ‘변화’에 한 표를 던졌지만, 콘텐트 제작자들은 꾸준히 PC 지수를 높여가고 있다. 콘텐트 속에서 성·인종·민족·종교 등에 대한 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이들의 역할을 축소하지 않았는지 질문을 던지며 이른바 소수자들이 이야기 안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충분한 역할과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문화계 핫 키워드로 떠오른 PC
성·인종·종교 소수자 동등한 대접
애니 ‘모아나’ 주인공에 원주민 소녀
게임 ‘오버워치’는 이집트 장애인
여성비하·성추행 연예인 하차 계기
국내 방송계도 차츰 눈뜨는 단계

이같은 흐름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곳은 바로 디즈니다. 디즈니는 12일 국내 개봉한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주인공으로 폴리네시아 원주민 소녀를 택했다. 제작진은 하와이부터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 피지·사모아 등 태평양 제도를 돌아다니며 인류학자·언어학자 등 다양한 원주민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고, 폴리네시아 원주민어로 ‘바다’를 뜻하는 모아나는 보기좋게 그을린 피부로 저주에 걸린 모투누이 섬을 구하기 위해 항해를 떠난다. 남자 주인공 마우이 역시 원주민 영웅으로 등장하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도, 일방적인 의존관계가 되지도 않는다. 그저 필요한 순간 서로 힘을 합쳐 역경을 헤쳐나가는 철저한 동반자 관계일 뿐이다.
디즈니의 새 애니메이션 ‘모아나’. 폴리네시아 원주민 소녀가 주인공이다. [사진 각 제작사]

디즈니의 새 애니메이션 ‘모아나’. 폴리네시아 원주민 소녀가 주인공이다. [사진 각 제작사]

디즈니는 더이상 예전의 디즈니가 아니다. 백마 탄 왕자와 백인 공주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졸업한 지는 이미 오래다. 인디언·중국인 여전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포카혼타스’(1995)·‘뮬란’(1998)의 변화는 흑인 공주가 등장하는 ‘공주와 개구리’(2009)로 이어졌다. 2014년 ‘겨울왕국’에 와서는 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자매애가 주제로까지 떠올랐다. 이번 ‘모아나’는 주인공의 외양 뿐 아니라 실제 목소리 연기까지 아우이 크라발호와 드웨인 존슨 등 하와이 출신 배우들에게 맡겼다. 극중 모아나는 “나는 공주가 아닌 모아나”라고 선포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픽사를 시작으로 마블·루카스까지 차례로 인수하며 영토를 확대해온 디즈니의 다각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백인 남성 중심의 스토리는 이제 더이상 새로울 게 없다. 캐릭터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서사 또한 다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된다”며 “여러 브랜드(제작사)가 유입되면서 디즈니가 변화했고, 이것이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작동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달 개봉한 ‘스타워즈’의 첫 스핀오프 영화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도 전투를 이끄는 여성 리더와 라틴계·동양계·아랍계 등 다양한 인종의 배우가 비중있게 참여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계에 부딪힌 새로운 이야기의 필요성, 여성·청소년 등 다양한 관객이 점점 목소리를 높여가는 시장의 변화가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디지털 코믹을 통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게임 ‘오버워치’ 속 캐릭터들. [사진 각 제작사]

디지털 코믹을 통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한 게임 ‘오버워치’ 속 캐릭터들. [사진 각 제작사]

여성 성상품화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PC 감수성에 상대적으로 둔감했던 게임 등 서브컬처도 변화하고 있는 모양새다. 블리자드는 지난해 야심차게 선보인 슈팅게임 ‘오버워치’를 통해 새로운 시대상에 동참했다. 60세의 이집트 여성 장애인 영웅 아나,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트레이서 등이 등장해 주목받았다. 이경혁 게임 칼럼니스트는 “지난해 거액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진 넥슨의 ‘서든어택2’가 선정성 논란으로 출시 86일 만에 종료된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며 “소수자를 이상한 스테레오타입으로 표현하는 콘텐트는 점잖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비자가 구매하기 꺼려지는 콘텐트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도 전투를 이끄는 여성 리더와 다양한 인종의 배우가 비중있게 참여한다. [사진 각 제작사]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도 전투를 이끄는 여성 리더와 다양한 인종의 배우가 비중있게 참여한다. [사진 각 제작사]

키즈 콘텐트의 경우는 부모들의 피드백과 발빠른 대처가 더욱 두드러진다. 유아 콘텐트 핑크퐁을 개발한 스마트스터디 관계자는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올바른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엄마(mom)’라는 구매 기능 버튼이 성차별적이라는 지적이 들어오면 ‘부모(parents)’로 곧바로 수정 반영하는 등 노력을 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국내 방송가는 이제 걸음마를 떼는 단계다. “나같은 프로불편러(높은 수준의 PC를 요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들이 있어야 세상이 바뀐다”고 말하는 곽정은(JTBC ‘말하는 대로’)이나 반대로 프로불편러를 비꼬는 “언니, 이거 나만 불편해?”(JTBC ‘아는 형님) 같은 발언이 함께 전파를 타면서 수면 아래에 있던 문제들이 하나씩 끄집어올려지는 중이다. 장동민·유상무 등 여성비하 발언을 한 개그맨이나 tvN ‘SNL 코리아’에서 남성 아이돌 성추행 논란을 일으킨 이세영 모두 하차하는 등 대중의 잣대도 점차 엄격해지고 있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인터넷에서 적극적인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등 수용자 역할이 적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최근 사태들이 한국의 PC 지수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