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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때로는 감정이 없는 기계인간처럼

중앙일보 2017.01.18 01:00 경제 11면 지면보기
<16강전 2국> ●·이동훈 8단 ○·커제 9단

5보(57~58)=검토실에서 상변 전투의 결과를 두고 설왕설래할 때 좌하귀 57이 떨어졌다. 음? 이건, 아닌데? 하변에서 흑▲와 백△를 아낌없이 교환해 흑? 준동의 가능성을 날려버리고 선수를 뽑은 이유는 백보다 한발 먼저 상변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뜻 아니었나? 그런데 단 두 수만을 주고받은 뒤 좌하귀로 손을 돌렸다. 전형적인 ‘궁하면 손 빼라’의 행태.

물론, 그 심정은 알 수 있다. 상변에서 흑이 계속 움직였을 때 예상되는 변화는 앞서 보여준 ‘참고도’처럼 백의 진영 안에서 ‘두 집을 내고 사는 것’(12…△). 이 그림만으로도 프로들이 가장 싫어하는 굴욕적인 삶인데, 그 과정에서 백은 상변 전체를 덮는 두터운 지붕 같은 세력을 구축하게 될 터이니 프로라면 누구라도 두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라면, 때때로 참아야 한다. 2선을 기어나가는 굴욕이라도, 쌈지를 뜨는 삶이라도 그 뒤에 승리가 기다리고 있다면, 감정이 없는 기계인간처럼 견뎌야 한다. 고하지욕(袴下之辱),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간 한신(韓信)도 그런 치욕을 참고 견디는 의지가 있었기에 훗날 유방(劉邦)을 만나 천하 경영의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아쉽다. 57을 본 커제는 기다렸다는 듯 상변 58로 두드린다.

손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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