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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9. 기이 - 나체의 빛 (1)

중앙일보 2017.01.18 00:01
물은 파랗고 차갑고 숨이 차다.
발끝부터 차오르는 물의 결, 눈앞이 아득해지면 내가 사라지는 순간이 스민다.
사실 이렇게나 작아져 물속에 누워있으니 무얼 할 수 있을까 싶다.
작고 반들반들해진 나를 내려다보던 기이의 눈을 떠올린다.
그렇다. 기이는 변했다.
갓난아기처럼 투실해져 툭하면 씨근씨근 숨을 몰아쉰다. 햇빛이 닿으면 코끝에서 미세한 빛 알갱이들이 부서져 내리고, 잘 여문 과일 같은 뺨으로 쿡쿡 웃었다. 텅 빈 두 개의 눈동자만 있던 기이는 사람처럼, 이제 완전하고 완강한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
 
“누가 기이인 너를 불렀나.”
 
나는 작아진 몸으로 묻는다. 기이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다. 자기가 이유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수많은 것들의 하나라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도 좋았기에 더 묻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도 좋은 건 기이.
기이를 알고 난 후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내가 여전히 서른인 것은 변함없지만, 많은 날들이 지나간 것도 사실이다. 열정의 날들이었다. 수많은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고 믿는다. 초침과 분침이 수천 번 교차하고 멀어져 가고 서로를 그리워하며 다시 맞닿는 동안이었다 말하고 싶다.
 
이를테면,
기이는 푸른빛과 함께 왔다.
보통의 날과 다름없는 밤이었다. 불을 끄기 전 창밖을 보니 달빛이 기묘하게 흐렸다. 기이하고 묘하게 흐린 빛,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런 밤이었다.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밝지 않아 사방이 어슴푸레했다. 곧 별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달이 멀어지는 시각이 다가올 거였다. 누군가 입김을 불어 넣은 것처럼 온기의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다.
기이, 기이.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한층 더 어두컴컴한 그것이 소리 냈다.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자고 서른의 나는 이런 시커먼 것을 불러내 기이, 기이, 하는 바람 같은 소리를 듣는가. 어둠에 누워 곰곰 생각했다. 내려다보고 있던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시커먼 그것이 쿡쿡 웃었다. 입이 있어야 할 곳에서 뜨거운 입김이 나와 얼굴로 쏟아졌다. 세상 어딘가에 뜨거운 함박눈이 있다면 꼭 그렇겠다는 느낌이었다.
눈을 뜨지 말아야 했을까, 아직도 생각한다.
호기심은 매번 품위를 이기고, 가슴을 더듬는 손이 부드러워서였다. 나를 어루더듬는 손을 보고 싶었다. 눈을 뜨자 내 몸 위로 고양이처럼 엎드린 나체가 보였다. 가만히 내려다보는 눈동자, 아무것도 실리지 않아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눈동자. 검은 얼굴에는 눈동자 두 개만 박혀 있었다.
엉덩이를 살짝살짝 흔들며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벼댄다.
몸에 와 닿는 살갗이 물의 결처럼 부드러웠다. 달빛에 드러난 하얗고 매끈하고 유연한 몸이었다. 살짝 건드리면 밀려갈 듯 말캉하게 일렁이는 몸이었다. 어깨너머로는 둥그스름한 윤곽이 이어졌다. 호리병처럼 늘어진 가슴을 보고 그것이 여자라는 걸 알았다.
 
집 앞으로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고 거실 창밖의 어둠은 깊지 않았다.
생각을 해야 했다. 저것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내게 자기 얼굴을 비벼대는 저것이 무엇인가.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리가 짖자 다른 개들도 따라 짖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와도 이상할 게 없는 새벽이었다. 개들이 짖지 않았다면 너무 고요해서 이상할 것 같은 새벽이었다.
놀라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아있던 내 목에 그것이 팔을 둘렀다. 뱀처럼 차갑고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 온몸의 돌기들이, 깊숙한 곳의 미뢰 같은 감각들이 꼿꼿하게 일어섰다.
도대체 이런 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꿈이 이렇게 실감 나는 냄새까지 달고 오기도 하는지 실내의 저 빛 한 가닥은 어디서 쏟아지는지 꿈이지만 벌거벗은 생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했다. 그것이 조그맣게 웃었다. 아니다. 그렇다 생각하게 하는 얼굴이었다. 병아리 같은 눈동자 두 개로 계속 웃더니, 고개를 길게 빼고 내 등을 쓰다듬는다. 마른 손가락들이 곤충의 촉수처럼 움직이며 등뼈를 쓸어내렸다.
 
그래.
등 아래쪽에 까만 씨앗 같은 게 돋아났지. 커지지 않기에 그 상태로 두었지. 옷이 쓸릴 때마다 찌릿 통증이 지나갔지만 내버려 두었지. 세상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조각으로 어둠 속에 엎드려 있었거든. 그건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마치 꿈처럼 모호한 슬픔과도 같아.
문장 한 줄 쓰지 못하는데 등뼈 사이로 돋아난 건 씨앗 모양의 자국뿐이었다.
나는 등단 십 년 차 변변치 못한 소설가였고 얼마 전 여자친구 윤이 떠났으며 서른이 되어서도 부모님께 손을 벌려 월세를 냈다.
오직 누군가의 온기 어린 포옹이 절실해졌다.
며칠이 지나는지 모르게 모호한 날들이 지나쳐갔다. 환했던 낮의 시간이 저물고 어두운 밤의 시간이 물러났다. 구부린 등으로 앉아 소설에 매달렸지만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어디에서도 문장들은 솟아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솟아 올리지 못하는 고장 난 인형이었다.

내 목에 팔을 두른 그것을 밀쳐냈다.
코도 입도 없이 민둥한 얼굴이 두 개의 까만 눈으로 빤히 보았다.
눈꼬리를 묘하게 일그러뜨렸고 그만큼이나 묘한 표정을 지었다. 벌거벗은 채 맨살을 작게 흔들며 아무것도 실리지 않은 눈으로 아무렇지 않게 내 위에 고양이처럼 엎드렸던 그것이 거실 창으로 걸어갔다. 맨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매끄러운 곡선의 나체는 새벽녘 달빛이 스며든 바닥에 엎드려 누웠다.
볼록한 엉덩이에서 빛이 반짝거렸는데, 원래부터 빛을 품고 있던 알전구처럼 노랗고 동글동글하게 환했다.
나는 그것에게 걸어가 쪼그려 앉았고 손을 내밀었다.
 
따뜻하고 말랑한 살이 닿았다. 갓 태어난 아기 같은 촉촉한 감촉에 손을 거둬들였다. 나체는 거짓말처럼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감촉으로 앞에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일본 인형처럼 눈매가 가늘고 얼굴이 창백했다. 거실로 스며들었던 달빛이 점점 더 옅어졌다. 창문을 열자 새벽의 거리로 뿌연 안개가 밀려오는 게 보였다. 저 멀리서라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골목은 깊게 어두웠다.
여자는 어떤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 눈에는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 기다란 속눈썹을 한 번씩 깜박거리며 안개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다. 거부감이 일거나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기묘한 인상의 눈이었다. 분명 낯이 익다. 어디선가 만난 기억이 있다. 나쁘지 않은 기운이지만, 문제였다.
기이, 기이.
내 앞에 누워있던 그것이 주문을 외듯 그런 것들을 되풀이했다.
 
“그러지 말고 말을 해요, 말을.”
 
내가 먼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처음 마주하는 생물에 불친절할 생각은 없었지만 첫마디가 그랬다.
 
“그럴까요?”
 
기다렸다는 듯 그것이 일어나 앉으며 대답했다.
나와 마주 보는 반들반들한 얼굴이 꼭 새까만 조약돌 같았다. 입과 코가 없는 민둥한 얼굴만 빼면 사람과 별 차이가 없지만, 엉덩이에 매단 동그란 빛무리는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나체의 볼록하고 동글동글한 빛이라니. 묘한 생물 앞에서도 무섭지 않았다.
 
“단도적으로 말할게요.”
 
“단도직입적이겠지.”

 
더구나 불완전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상대라면, 그만큼 빈틈이 많다는 뜻이다. 나는 오므렸던 발가락들을 폈다.
 
“아직 진행 중인 몸이라 그래요.”
 
그것이 말했다. 역시, 완전하지 않구나.
내가 생각하는 동안 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작게 열려 뻐끔거리던 입구가 조금씩 열리고 검은 잇몸에 작은 치아들이 주르륵 돋았다. 머릿속에서 무어라 말을 고르는데 그것이 쑤욱, 손을 내밀었다.
 
“네?”
 
“좀 잡아줘요. 몸이 떨려. 그리고 기이라고 했잖아.”

 
어색하던 발음과 문장 구사도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마주 본 채 엉덩이가 뒤로 향해서인지 어슴푸레한 윤곽으로만 보였다. 그것이 손가락들을 눈앞에서 좌우로 흔들었다. 만난 적도 없는 이상한 생물이 손을 잡아달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창밖은 하얀 눈으로 가득했다.
 
“이것 좀 봐. 계절이 다시 왔어. 신기하지.”
 
그것, 그러니까 기이가 가리킨 곳을 보자마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가슴에 돋아난 작은 식물 두 개.
정확히 말하자면 양쪽 젖꼭지에 부러 꽂아놓은 것처럼 각각 돋았다.
한참 바라보았다. 푸르고 가느다란 식물과 그것을 가리킨 손가락들을. 입이 생긴 기이의 얼굴도 점점 환해지며 살빛이 돌았다. 아니. 온몸이 그랬다.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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