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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배려는 됐고, 돈으로 주세요

중앙일보 2017.01.11 00:36 종합 28면 지면보기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넉 달 전 방송한 코바코의 저출산 공익광고 ‘아이의 마음’편은 ‘출산지도’ 논란의 전조곡이었다. 광고는 임산부를 어린아이로 묘사한다. 미래의 아이를 위해 임산부를 배려하란 취지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일찍 퇴근을 시켜주고, 자리를 양보해 주고, 무거운 짐을 들어 주는 ‘배려’를 베풀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반발은 컸다. 여성을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아이를 낳을 존재로만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비판만큼이나 나는 광고 카피가 마음에 걸렸다. “엄마가 되는 기쁨, 모두의 배려에서 시작합니다. 당신의 배려를 보여주세요.”

‘배려’란 단어가 걸쩍지근하게 전두엽에 남아있는 사이, 1년째 여행 중인 핀란드 기자와의 대화에서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5월 즈음에 돌아가면 여름휴가 대체근무가 쏟아지기 때문에 당장은 굶을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대체 인력이 보편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여름휴가 때문에 대체 인력을 고용한단 얘기는 가물가물했다. “직원이 육아휴직을 하거나, 병가를 내거나 휴가 시즌이 되면 회사는 대체 근무자를 고용하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구성원이 피해를 보잖아요. 한국은 그럼 육아휴직을 안 해요?” 핀란드인 에바에게 육아휴직은 대체인력 고용을 의미했다.

육아휴직의 장벽을 낮추는 건 직장 동료들의 배려가 아니다. 배려는 맨땅에서 생기지 않고 대가도 따른다. 업무 공백으로 일이 많아지면 불만이 쌓이는 게 사람이다. 선한 마음으로 이해하라는 주문은 먹히지 않는다. 쌓인 불만은 ‘여자들은 일을 안 한다’는 직장 신화와 낮은 평과 고과로 고스란히 돌아온다. 불만도 빚도 없는 ‘아름다운 휴직’은 회사와 정부가 추가 인력을 고용하거나 추가 업무만큼 수당을 줄 때만 가능하다.

어린이집 운영시간도 마찬가지다. 법적으론 저녁 7시30분까지 운영해야 하지만 어린이집은 오후 네다섯 시면 아이를 데려가라고 한다. 학부모들은 발을 동동 구르지만 8시간 치 월급밖에 못 받는 선생님들에게 ‘12시간 운영이 법’이라며 엄격하게 ‘직업정신’을 요구하진 못한다. 복지부는 매번 어린이집 단속에 나서겠다고 발표하지만 교사들에게 야간근무 보조금을 제대로 지급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럼 엄마들이 “7시30분이 법”이라고 먼저 당당하게 얘기하고 이들도 시간을 지킨다.

배려가 사람의 선한 마음에서 나온다는 건 환상이다. 돈에서, 시간에서 나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은 돈과 시간의 곳간이 텅텅 비었다. 당연히 인심이 나기 어렵다. 고위 공직자들이 “국민들 의식이 문제해결의 걸림돌”라고 얘기하는 것을 자주 듣는다. 진짜 걸림돌은 개개인의 배려로 문제를 때워보려는 정부 아닐까.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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