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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 “차 사고로 하늘 간 엄마 … 눈 올 기미만 보여도 그날 악몽이…”

중앙일보 2017.01.10 16:08 강남통신 10면 지면보기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시작합니다. 분노, 질투, 외로움, 조바심…. 나를 스스로 괴롭히며 상처를 주는 내 마음속 몬스터들입니다. ‘서천석의 내 마음속 몬스터’를 통해 내 안의 몬스터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져
‘초대하지 않은 손님’ 내버려두면 나가
옛 기억 뺄셈보다 새 기억 덧셈이 현명




“선생님, 그 일을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요.”

희주씨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머리를 세게 흔들면 원심력에 기억이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기대하는 듯 그는 절실했다. 흔들리다 멈춘 얼굴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벌써 오랜 시간 흐른 눈물임이 분명했다. 그의 눈가에는 주름이 있었는데 눈물이 흐르고 흘러 파낸 고랑 같았다.

그렇다고 희주씨의 삶이 늘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일을 하고 있고 직장에서의 평가도 나쁘지 않다. 나서서 농담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동료들의 농담에 웃으며 맞장구를 친다. 가끔은 오래된 친구를 만나 영화도 보고, 인터넷으로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구경하기도 한다. 꽃집을 지날 때면 멈춰 서서 한참을 들여다 보다 가끔이지만 한 단 사서 기쁜 마음으로 집에 가져온다.

하지만 겨울이 오고 남들은 설레는 눈이 올 때면 희주씨는 견디기 어렵다. 눈이 오지 않아도, 묵직하게 무거운 하늘만 느껴져도 희주씨의 눈가는 부풀어 오른다. 머릿속에는 떠오르고 싶지 않은 기억이 가득 차고, 애써 지우려 해도 기억은 멈추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순간이든 행복한 순간이든 감정적으로 강렬한 순간의 기억은 잊기 어렵다. 감정이 강하지 않다면 우리 머리는 일어난 사건과 그 사건에 수반한 감정을 분리한다. 그러면 감정은 휘발되고, 사건만 저장된다. 효율적인 저장을 위해 사건의 세부적인 면은 날려 버린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강렬한 순간의 기억은 그 사건이 통째로 기억된다. 세부적인 것도, 일부 왜곡은 있을 수 있지만 사소한 것까지 저장된다. 그러다 보니 작은 단서, 냄새나 촉감, 그때 스쳐갔던 사물만 봐도 기억이 되살아난다. 게다가 감정이 분리가 안 되다 보니 사건이 떠오를 때면 당시의 감정을 그대로 재경험 한다. 특히 위험한 일, 내 존재를 위협하는 사건의 경우에는 더 강렬하게, 마치 인두로 지진 것처럼 두뇌에 자리를 잡는다.

어떤 사람은 아들이 죽은 날 신었던 신발의 상표만 봐도 눈물이 고이고, 누군가에겐 낭만적일 수 있는 군밤 냄새에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희주씨는 눈만 내리면 눈길에 미끄러진 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엄마가 떠오른다. 어찌된 일인지 응급실에서 주워든 엄마의 코트에는 녹지 않은 눈이 묻어 있었다. 희주씨는 그날 이후 보라색 코트도, 하얀 눈도 보기 어렵다.

희주씨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해왔다. 운명이란 정해진 것이고, 이것도 엄마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도 내가 사랑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생각은 계속 났다. 왜 자꾸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오를까 싶어 이유도 찾아봤다. 자신과 엄마의 관계는 어땠는지, 마음의 어떤 부분이 자극을 받아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열심히 생각해봤다. 그럴수록 엄마에 대한 생각은 더 많이 났고 희주씨는 더 우울해졌다. 잊으려 할수록 희주씨는 늪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잊어야 한다며, 엄마도 그것을 바랄 거라고 마음먹고 핸드폰 첫 화면에 ‘사랑한다면 잊자’고 써두기도 했다. 친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일부러 스키장에 가서 눈밭에 누워보기도 했다. ‘이것이 뭐라고,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 거야’ 싶었지만 그날 밤새 울다 쫓기듯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기억을 잊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기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잊으려 노력할수록 기억은 다시 호출되기 마련이고, 자주 호출될수록 기억은 더 단단해진다. 억지로 잊는 것은 불가능한 싸움이다. 기억은 길과 같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은 먼지가 뒤덮고 잡초가 자라 나중에는 희미해진다. 하지만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단속하기 위해 경찰이 자주 다니면 길은 선명해진다. 기억이란 저절로 희미해지는 것이지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면 더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3그램』3g은 난소 한 개의 평균무게이자, 젊은 나이에 난소암 투병을 했던 신수지 작가의 그래픽노블 제목이다. 이상 증상을 느끼고 병원을 전전하던 때부터 퇴원 후 병원 문을 나서기까지 일어난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슬픔과 웃음,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옆의 삽화는 이 책의 일부분을 옮긴 것이다. 미메시스, 1만4800원.

『3그램』3g은 난소 한 개의 평균무게이자, 젊은 나이에 난소암 투병을 했던 신수지 작가의 그래픽노블 제목이다. 이상 증상을 느끼고 병원을 전전하던 때부터 퇴원 후 병원 문을 나서기까지 일어난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슬픔과 웃음,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옆의 삽화는 이 책의 일부분을 옮긴 것이다. 미메시스, 1만4800원.

우리는 기억을 좌우할 수 없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억은 우리를 따라 다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은 이미 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일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있다. 그 일이 우리가 원하던 일이든, 아니면 원하지 않던 일이든 과거는 내게서 떨어질 수 없다. 과거가 사라진다는 것은 실은 내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다. 더 많이 떠오르는 과거라면 내게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더 중요한 나의 일부분이다.

물론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만 나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많은 일들이 나를 만들어간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고, 내일의 나는 또 다를 것이다. 현재가 내 안에 저장되어 미래의 내가 만들어진다. 기억은 뺄셈은 없고 덧셈만 있는 것이기에 과거를 잊으려는 노력보다는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서 더하는 편이 낫다. 내가 변하지 않는 이유는 현재조차 과거의 기억에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가 너무나 힘이 세서 소중하고 의미 있는 기억을 만들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그저 과거의 그림자인 시간들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기억을 애써 지우려 할 필요는 없다. 기억이 떠오르면 우리는 잠깐 머무르면 된다. 피할 수도 없는 것, 피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눈물이 나면 그 자리에 멈추고 눈물이 멈추면 다시 앞으로 가면 된다. 기억은 아직 내게 소중하니까 떠오를 뿐이다. 그러니 잠시 머물러 다시 살펴본다. 그 기억이 또 떠오르지 않을까 겁먹을 필요 없다. 혹시 떠오르면 어떻게 하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오히려 내게 해롭다.

나가지 않는 기억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과 같다. 어느 날 집에 들어와 우리 집에 머문다.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가고, 쫓아낼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을 두고 나는 그냥 내 삶을 살아야 한다. 다른 손님도 부르고, 잠시 외출도 해야 한다. 절대 갖지 말아야 할 생각은 이 사람을 내보내지 않는 한 내 삶은 나아질 수 없다는 포기다. 그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지만 내게 소중한 손님이다. 그에게 자리를 깔아주자. 가끔은 그와 놀아도 주자. 희주씨도 시간을 정해 어머니를 기억하는 것이 좋다. 피하다가 생각이 떠오르게 하지 말고 시간을 내서 기억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이 집의 결정권을 가진 주인은 희주씨 자신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초대하지 않은 그 손님이 희주씨 삶의 미래는 아니다. 희주씨에겐 새로운 손님이 필요하다. 그것도 더 많이 필요하다. 더 많은 초대한 손님 가운데 초대하지 않은 과거의 그 손님이 한 명 머문다고 해도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다. 우리는 감정이 있기에 상처를 받는다. 그렇다고 감정을 눌러서는 곤란하다. 더 풍부한 감정을 갖고 현재와 마주쳐야 상처를 과거로 보낼 수 있다. 희주씨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처받더라도 다시 삶을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다.





 
서천석
1969년생. ‘아이와 부모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서울대 의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음의 병의 뿌리는 어린 시절에 있다’는 걸 깨닫고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됐다. 『그림책으로 읽는 아이들 마음』 『우리 아이 괜찮아요』 등 육아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이자 행복한아이연구소 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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